 리 효 종 포천한시사 대표
호는 독곡(獨谷), 본관은 창녕, 여완(汝完)의 아들, 고려조에서 문과에 급제 성균관 사성 지신사(知申事:도승지). 1384년(우왕10) 밀직제학으로 왜구를 격퇴하고 수성좌리공신(輸誠佐理功臣)이 되었으며 창원군(昌原君)에 봉하였다. 이어서 예문대제학·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올랐다.
조선조 건국에 있어서는 이태조를 도와 판한성부사 문하우정승 좌리공신 창원부원군에 봉해졌고 그후 영의정에 올랐다.
태조의 다섯째 아들 방원은 신의왕후 한씨 소생으로 태조가 창업할 때 가장 공이 많았다. 그러나 세자(世子)는 정도전 등의 동의로 신덕왕후 강씨 소생인 방석(芳碩)으로 정해졌다. 이에 불만을 품은 방원은 군대를 동원, 세자책봉에 동조했던 정도전, 남은 등을 죽이고 세자 방석과 그의 형 방번을 제거하는 일차 왕자의 남을 일으켰다. 대노한 태조는 왕위를 정종에게 물려주고 밤중에 함흥관저로 떠나 버렸다.
정종은 2년만에 아우 방원에게 선위하니 이가 태종이다. 태종은 왕위에 오르기는 했으나 태조가 자기에게 불만으로 환궁하지 않으므로 부왕을 환궁하게 하기 위하여 문안사를 중신중 가운데서 차출하여 보냈으나 가는 문안사마다 주살되고 돌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한번가면 돌아오지 않을 경우에 그것을 일컬어 함흥차사(咸興差使)라고 부르는 말은 이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더 이상 함흥차사로 가겠다는 사람이 나오지 않자 성석린이 지원하고 나섰다. 태조와 친분이 두터운 그는 자기가 태조의 마음을 돌리고 오겠다고 자청한 것이다. 태종은 기꺼이 허락하였다. 그는 무명옷에 백마를 타고 떠났다. 함흥에 도착하자 그는 말에서 내려서 나그네가 하듯 밥을 지었다. 밥짓는 연기가 나자 멀리서 바라보던 태조가 그에게 환관을 시켜 물어 왔다. 성석린은 환관에게 볼일이 있어 이곳을 지나가다 날이 저물어 말도 먹일 겸 투숙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환관이 돌아가서 그대로 아뢰자 태조가 반갑게 그를 불러 들였다.
석린은 조용하게 인륜의 중요함을 말하고 어려움에 대처하는 방법을 개진하였다. 태조가 갑자기 얼굴빛을 바꾸며 물었다. ‘너는 너의 임금을 위하여 나를 설득하려 왔는냐?’ 겁을 먹은 석린은 엉겹결에 이렇게 말했다.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제 말씀이 거짓이라면 제 자손은 반드시 장님이 나올 것입니다.’하였다. 어쨌든 태조는 그 말을 믿고 마음을 돌렸으며 아들 태종임금과 화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석린의 집에 생겼다. 그의 맏아들 지도(之道)는 장님이고 둘째인 발도(發道)는 자식이 없고 지도의 아들 창산군(昌山君) 귀수(龜壽)와 귀수의 아들이 모두 뱃속 장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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