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열린 포천문화원의 ‘2015년도 학술연구발표회’에서는 ‘포천을 빛낸 인물 연구’라는 주제 아래 포천현감 이지함 선생, 창주 이성길 선생, 감호 양만고 선생이 재조명 됐다.
대진대학교 박윤선 교수에 따르면, 포천현감 이지함 선생은 당대 민중들에게 ‘인기인’이었다고 말한다. 이지함 선생은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서 공부해 경사자전(經史子傳)에 통달했고, 스승의 영향을 받아 역학·의학·수학·천문·지리에도 해박했다.
그는 한산 이씨 명문가의 후손임에도 피지배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위치에 섰다. 생애 대부분을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의 생활고를 목격하고, 그 속에 뛰어 들어가 백성을 위한 대책을 제시했다. 주민들에게 장사하는 법과 생산기술을 가르쳤으며, 자급자족의 능력을 기를 것을 강조했다. 안면도 남쪽 어딘가에 들어가서 박을 키워 바가지를 만들고 화염도 구워 한양에 가져가서 내다 팔아 빈민들을 돕는데 썼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이지함 선생의 학풍과 사상은 개방성과 다양성을 특징으로 한다. 의(義)와 이(利)를 대립적인 것으로 이해하지 않고 백성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성인도 원칙을 버리고 권도(權道) 즉 임시변통책을 펼 수 있다고 밝혔다. 그의 혁신적인 사회경제 사상이 조선 후기 북학사상의 원류가 됐다고도 한다.
그 주변인물도 충분히 존경을 살 위인이다. 이지함 선생의 스승인 서경덕 선생은 입신양명의 목적을 “백성의 더위를 시원하게 식혀줄 부채와 같은 일을 하기 위한 것”이라고 봤다. 또 이지함 선생의 지인인 남명 조식 선생은 조정에서 내린 벼슬을 받지 않겠다며 ‘을묘상소’란 상소문을 올려, 에둘러 표현하지 않고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했다고 직설적으로 말하고, 궁극적인 책임은 통치자에게 있다고 서슴없이 직언하기도 했다.
이지함 선생은 57세의 나이인 1573년 유일(遺逸)로 천거됐고, 1574년 6품직을 제수 받아 포천현감이 됐으나 이듬해 사직했다. 아산현감으로 있던 윤춘수(尹春壽)가 백성들에게 온갖 행패를 부려 원성이 높아지자 1578년 이를 해결하기 위해 아산현감이 돼서는 걸인청(乞人廳)을 만들어 관내 걸인의 수용과 노약자의 구호에 힘쓰는 등 민생문제의 해결에 큰 관심을 가졌다.
한편, 서장원 포천시장은 이지함 선생과 같은 57세의 나이에 강제추행·무마 혐의로 교도소에서 징역 10개월을 살고 항소심을 받고 있는 과정에서 업무에 복귀했다. 서 시장은 의정부교도소 정문을 나서자마자 출소 소감으로 "시민을 위해 열심히 일하겠다"고 밝혔다.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 대한민국의 헌법이 보장하는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시장직에 복귀한 서 시장은 10개월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업무파악부터 현장점검까지 활동폭을 넓히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인다.
서 시장은 사죄 한 마디 없이 업무에 복귀해 시민들을 분노하게 했다. 각 언론사 인터뷰와 기자회견을 통한 시민사과를 거절한 채 사퇴 요구가 거세지자, 지난 18일 사과가 포함된 시장복귀 의사 입장표명에 대한 보도자료를 배포하는, 비교적 미지근한 대응을 했다.
과연 앞으로의 포천은 어디로 갈 것인지 지역사회는 끊임없이 술렁이고 있는데, 그 책임을 피할 수 없는 서 시장 등은 어떤 현상 타개책을 갖고 있는지, 어떤 포천을 지향하는지 그 속내를 명확히 드러내지 않고 있다. 포천시민만 그저 애가 탈 뿐이다.
서장원 시장은 주민들의 이익을 대변하면서 우선시 했던 이지함 선생의 포천현감 재직 시기를,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 되돌아봐야 할 필요성이 있다. 그리고 본인을 향한 ‘손가락질’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주민과의 소통, 언론과의 소통을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