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면암 최익현에 대한 인품을 논할 때 강직하고 꼿꼿한 기질을 지닌 강인한 선비로 인식하고 있다. 물론 관리로서 그는 어떤 난관에도 직언을 망설이지 않았고 의병장으로 의연함을 잃지 않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런 외적인 품성과는 다르게 가족에게는 아들로서 효로써 섬기었고, 아버지로는 자상한 인품을 보였던 인간적인 면모도 있었다. 최익현이 쓴 편지와 한시 속에는 부친에게 전하는 효성과 자식에게 끊임없이 보내는 애정이 있었고, 일가친척에게 안부를 묻는 글 속에서 강한 사상가나 불굴의 의병운동가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면모를 읽을 수 있다.
그의 효성에 대해서 비운의 선비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은 자신의 기록『매천야록』에서 최익현의 가난한 삶과 늙은 부친을 봉양하는 모습, 농사일도 손수 하면서 직위가 높아질수록 겸손했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는데 내용은 이러하다.
"최익현은 집은 매우 가난하였으나 늙은 아버님을 잘 봉양하여 지극한 효성을 다하였다. 날씨가 차가울 때는 언제나 그의 부친 방에 친히 불을 때면서, '내 대신 수고할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따뜻하게 하고 시원하게 하는 일을 알맞게 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친히 경작을 하여 식생활을 해결하고 시초(柴草;땔나무 풀)도 마련하였다. 심지어 울을 막고 포전(圃田;개울가 밭)일을 하는 것까지 자신이 다 하였고, 한성에 무슨 일이 있으면 도보로 왕래하였다. 그리고 그의 만년에는 뜻을 더욱 겸손하게 가졌지만 직위가 더 높아져 한 때는 북두성처럼 선망을 받았다." (『완역매천야록』권1, 「갑오이전」, 교문사, 1994, 46~47쪽.)
뿐만 아니라, 일가의 전언에 의하면 걸음걸이가 매우 빨라서 젊은 사람도 뛰어야만 따라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일가들의 전언에 의하면 포천이 출생지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충청도로 출계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만년에는 여러 가지 기록에서도 확인 되듯이 고향인 포천에서 살았던 것이 분명하다.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계유년에 대원군의 실정을 비판하고 급기야는 대원군을 하야 시켰던 최익현은, 계유상소 이후 제주도로 유배를 가면서 『면암집』에 기록된 서신을 보면 부친의 걱정을 덜어드리려는 자식의 모습이 조심스럽다.
"아버님께 올리는 편지, 글월을 부치고 난 뒤에 마침 성생(成生)이 들어와 삼가 5월 20일 이후에 보내신 하서(下書)를 받자옵고, 그간의 안부와 여러 일들이 대체로 편안하심을 살피오니, 다소간의 근심 걱정이 자못 햇살에 녹아 없어지는 듯합니다. 의로의 마음 한량없습니다. 자부(子婦)의 병세가 아직도 그러하다니, 괴이한 일입니다. 만약 혈기가 약하여 차도가 없는 것을 보면, 혹여 마음의 병으로 그런 것이 아니겠는지요? 민망하고 답답할 뿐입니다. 각처에 보낼 답장은 우선 미뤄두고 몇 자 올립니다. 갖추지 못합니다. 살펴주소서…"
면암은 흑산도 유배길에서 부친의 편지를 받고나서, 그동안의 근심과 걱정이 없어진 것 같다는 심정과, 부인의 병이 자신의 일로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지 걱정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 그러나 부친에게는 예를 갖추고 있고 부인의 병에 대해서는 완곡함을 보이고 있다.
"밤낮으로 소원하여 비는 것은 다름이 아니오라 다만 아버님과 형제들이 편안한 것입니다. 그 밖에 요즈음 앙마소거(秧馬繅車; 앙마는 농구의 일종으로, 이것에 걸터앉아 모내기를 하였으며, 소거는 명주실을 감는 데 쓰는 도구 따위를 말한다.) 와 총탕맥반(葱湯麥飯; 파국과 보리밥) 따위의 흐뭇한 농촌 정경이 고향 생각을 간절하게 합니다. 배편이 오래 막혔는데 요사이 일은 또 어떻게 되었습니까? 판관(判官)이 새로 왔기에 세상 이야기를 물었더니, 술 취한 것같이 흐릿하여 믿을 수가 없습니다. 다만 삼정승만이 아직도 외방에 있으면서 인책하였다고 하니, 내용을 대개 짐작할 만합니다. 관보로 공고된 것 이외에는 일체 편지 속에 적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곳도 유언비어가 제동(齊東)보다 심하니 몹시 두렵습니다.”『면암집』권15, 서, 상백종형 갑술, 5월 13일.
여기서 백종형(伯從兄)은 최익현의 친형인 최승현(崔升鉉)을 이르는 말로, 친형인 승현이 백부인 암(嵒)에게 출계하여 백종형이라 하지만 실제로는 친형이다. 여기서는 형에게 가족의 평안함을 바라는 마음을 전하면서, 유배지에서 고향인 포천을 생각하면서 유언비어에 현혹되지 말고 공식적인 발표 외에는 일체 신뢰하자 말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장자인 영조에게 보낸 글에는 부모로서 집안을 걱정하는 마음과 학문에 열중하라는 조언 그리고 엄격하면서도 간절함이 녹아 있기도 하다.
한편 그가 막내아들 영복에게 보낼 글에는 이러한 내용이 담겨져 있다.
"전에 여러 차례 부친 편지를 하나하나 보니, 병석에서 거의 죽어 가는 몸이라 비록 답장은 못했어도 즐겁기는 그지없다. 그동안 온 집안 모두 별고 없느냐? 모름지기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가사를 돌보고 술증(述曾)을 달래고 깨우쳐 헛되이 지내지 아니하도록 하여라. 나는 길에서 떠돌아다니면서 체직(遞職)의 은혜를 입지 못하였으니, 형세를 보아 겨울을 지내고 일기가 화창하면 돌아갈 예정이다. 걱정하지 말고 학문에 힘쓰기 바란다." (『면암집』권15, 서, 「여계자영복」)
면암은 노구임에도 불구하고 긴 객지생활로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도, 부모로서 자식을 걱정하며 자식에 대한 다정함을 보여주면서, 강인함과 위로의 뜻과 인간적인 기풍을 담아 막내아들을 걱정한 다정한 아버지이기도 했다.
우리는 그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나라를 걱정한 최고의 선비로 내세우고 있지만, 그 내면에 대한 기록들은 대부분 도서관에서 잠들고 있는지 확인할 때가 되었다. 아무쪼록 자라나는 후학들에게 나라를 위한 고귀한 선비정신을 지켰던 분들에 대한 기록들을 잘 정리하여, 우리의 정체성과 정신을 바로 가르칠 수 있도록 지자체와 교육기관들의 연구와 노력을 당부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