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29일 “광해군의 불행한 가족사” 제하의 칼럼에서 광해군 대의 충신이었던 “어우야담(於于野談)”의 저자 유몽인을 언급한 바 있는데 본 칼럼에서는 인조반정 이후 광해군이 죽음을 모면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완평부원군 오리 이원익의 생애를 소개한다.
사실 그동안 이원익에 대하여 별로 아는 바가 없었는데 광해군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그가 대동법을 실시하는데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원익에 대하여 놀랍게 생각되는 점은 선조를 비롯하여 광해군, 인조 3대에 걸쳐서 정승을 역임하였다는 것인데 그가 과연 어떤 인물인지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특히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된 이후 인목대비를 비롯하여 서인들이 광해군의 죽음을 주장하는 긴박한 상황에서 광해군의 신하로서 그의 목숨을 살려 주어야 한다고 인조에게 말한 사실을 알게 되면서 마치 한편의 시로써 광해군에 대한 충성을 지켰던 유몽인을 대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원익은 1547년(명종 2) 한성 동부 유동 천달방에서 함천군 이억재와 동래정씨 사이에 2남 1녀중 차남으로 태어났는데 그의 고조부는 태종의 8남 익녕군이었다는 사실인데, 그가 태어난 지역은 현재 서울시 종로구 동숭동 일대라고 할 수 있다.
13세에 동부학당에 입학하였으며, 17세에 진사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무효가 되는 바람에 1564년(명종 19) 봄에 생원 초시를 치러 합격하였으며, 결국 가을에 최종시험이라 할 수 있는 복시에 합격하면서 소과의 관문을 통과하였다.
5년 후가 되는 1569년(선조 2) 23세에 비로서 문과에 급제하면서 승문원 권지(權知)에 배속되는데 여기서 승문원이란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업무를 수행하는 기관이니 오늘날의 행정부서로 말한다면 외교부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다소 생소하게 느껴지는 권지(權知)란 현재로 말하면 인턴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는데, 이원익은 이렇게 승문원에 있다가 비로소 종9품직인 승문원 부정자에 배속되면서 그 오랜 관직생활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1573년(선조 6) 성절사 사신단의 질경관으로 당시 명나라의 수도 연경(燕京)에 다녀온 바 있으며, 1574년(선조 7)에는 황해도 도사(都事)에 임명되었다.
여기서 도사(都事)란 직책은 수령들을 규찰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종5품의 관직으로서 이원익의 지방관직으로는 처음이라 할 수 있다.
이어서 1575년(선조 8)에 다시 중앙관직으로 복귀하여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되었으며, 그 이듬해에 정6품직인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다.
1582년(선조 15) 왕의 비서라 할 수 있는 동부승지에 제수되며, 1583년(선조 16) 다시 우부승지로 임명되었다가 결국 그해에 당쟁의 영향으로 물러나게 된다.
한편 1584년(선조 17) 부친상을 당하여 삼년상(三年喪)을 지내게 되며, 1586년(선조 19) 10월 탈상한 뒤 그 이듬해에 금강산을 유람하게 되니 이 시기가 그의 생애에 있어서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587년(선조 20) 평안도 안주 목사로 임명되는데 바로 이 관직이 이원익이 훗날 정승으로서 명성을 얻게 되는데 있어서 하나의 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4년 동안 안주 목사로 재임하면서 백성들의 신망을 얻었으며, 1591년(선조 24) 형조참판으로 승진되었으며 그 이후 호조판서를 시작으로 예조 및 이조판서를 역임하였으니 현재로 말하면 정부의 핵심요직에 포진되었던 것이다.
1592년(선조 25) 20만 명의 왜적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되며, 결국 선조는 도성(都城)을 비우고 비내리는 새벽에 100명의 호종(扈從)을 받으면서 평양으로 피난하게 되는데 이원익은 선조가 피난하는데 있어서 막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는 조선에 4만의 병력을 파병하였으며, 거기에 따른 군량미의 문제가 보통문제가 아니었지만 이원익이 평소의 능숙한 중국어 실력을 발휘하여 명나라 장수들을 상대로 군량조달 문제를 원만히 처리하였다는 점이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이 있는데 그것은 평양성이 결국 왜적에 의하여 함락되면서 선조는 더 북쪽으로 피신을 가게 되며, 결국은 명나라로 망명하는 문제를 추진하였는데 여기에 대하여 이원익이 선조의 망명을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는 것이다.
1595년(선조 28) 6월 류성룡의 천거를 받아서 관찰사에서 일약 우의정으로 승진하였는데 조선왕조가 건국된 이래 이렇게 관찰사에서 정승으로 승진한 사례는 이원익이 최초였던 것이다.
7년간에 걸친 임진왜란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인 1598년 8월에 이원익은 명나라에 진주사로서 연경(燕京)에 가게 되며, 그 이듬해 1월초에 귀국하나 이미 그는 영의정에 임명되어 있었으며, 이덕형과 이항복도 각각 좌의정과 우의정에 임명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원익은 6번의 사직상소를 올린 끝에 결국 그해 11월에 영의정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그 이후 1600년(선조 33)부터 광해군이 즉위하는 1608년(광해 원년)까지 그는 고향인 경기도 금천에 머물렀는데 현재 이 곳은 광명시 소하동 2동 일대에 해당된다.
여기서 선조가 평소 이원익에 대하여 어느 정도 깊은 신뢰를 가지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일화(逸話)를 소개한다.
선조는 죽음을 앞두고 광해군에게 “여러 신하 중에 오직 이원익에게만 큰 일을 맡길 수 있다”라고 말하면서 그에 대한 깊은 신뢰를 보였는데 광해군도 그러한 선조의 유교(遺敎)를 따르는 의미에서 즉위한 이후 첫 영의정에 이원익을 임명하였던 것이다.
박관우 / pgu77@naver.com 역사작가, 칼럼니스트, <역사 속에 묻힌 인물들>의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