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혁명은 ‘혁명’이라기보다는 ‘의거’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의거’라고 주장하는데에는 4.19의거가 처음부터 정권을 탈취할 목적으로 한 투쟁이나 정치이염을 구현하기 위한 체제 변혁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다만 정의감에 불타는 청년학생의 불의(不義)에 항거한 의분(義憤)이 집단행동을 취하는 과정에서 사태변전(事態變轉)을 가져오고 발전한 하나의 현상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한국의 헌정체제(憲政體制)의 혁명적 변혁(革命的 變革)을 가져오고 정권(政權)의 비정상적 교체를 초래했다는 점에서 ‘혁명적’ 요소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필자는 교직에 재직하는 국가공무원의 신분으로 자유당 말기의 썩고 병든 정치·사회 현실을 혁명이 아니고는 타개하고 개혁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졌었다.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민주항쟁의 시발점(民主抗爭之 始發点)이 된 서울시내를 누비던 강렬한 데모 행렬(行列)이나 대통령의 하야(下野) 과정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첫째, 한국 국민의 민주의식의 발전을 의미하며 민주주의 토착화(土着化)를 위한 불기피한 전통과 자기투쟁을 의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 ‘관권(官權)’의 횡포에 대한 ‘민권(民權)’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주권재민(主權在民)’의 ‘민주주의(民主主義)’의 의의를 그대로 입증(立證)하였다고 볼 수 있다.
셋째,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전세계적으로 일기 시작한 이른바 ‘스튜던트 파워(Student Power)'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또, ‘3.1운동’, ‘광주학생운동’을 통해서 강한 ‘저항의식’과 열렬한 ‘애국·애족심’을 발휘한 전통적 저항의식과 애국심의 발로라고 볼 수 있다.
넷째, 4.19민주의거(혁명)의 민주이념은 그 후의 정권 담당 세력의 무능과 경제 사회적 기반의 취약성(脆弱性)으로 미완(未完)의 상태로 좌절되었다는 점에서 한국 국민에게 또 하나의 각성(覺醒)과 교훈(敎訓)을 안겨준 계가기 되었다. 이러한 국민적 각성이 4.19의거(혁명)가 5.16혁명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4.19의거(혁명)의 역사적 의의가 감소된 것은 결코 아님을 우리는 명심(銘心)해야 한다.
4.19의거(혁명)에서 촉구되고 추구된 민주이념과 사회정의의 실현은 한국정치·사회에서 앞으로 지향(志向)해야 할 최고가치(最高價値)임을 확인할 수 있게 했다는 점만으로도 4.19의거(혁명)는 한국의 헌정발전사(憲政發展史)에 있어 영원불멸의 가치와 의의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4월 19일은 1973년 3월 30일 대통령령으로 제정·공포하여 정부 주관의 기념일로 정해졌다. 공휴일은 아니지만 자유와 정의를 쟁취한 이날을 정부와 학교에서 잊지 않고 명심하자는 기념행사를 하고 있다.
4.19의거(혁명)의 시발점이 된 ‘민족 고대(民族 高大)’는 이를 계기로 교표(校標)가 혁명의 상징인 ‘호랑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