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고향은 전북 변산 이다. 우리 마을의 가로수는 벚나무로 참으로 일품이었다. 신작로를 따라 피어나는 벚꽃은 봄마다 꽃 잔치를 하며 우리를 즐겁게 하였다. 하지만 나무도 나이를 견디지 못하는지 오래전에 하나씩 사라지더니 아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벚나무는 사라졌지만 하늘을 하얗고 붉게 장식하던 벚꽃의 영상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다.
인간이 아무리 속물화되어가더라도 어린 시절에 형성된 절대적인 아름다움의 상관물은 쉽게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필자가 재직 중인 대진대학교는 포천의 왕방산에 자리하고 있다. 봄이면 각양각색의 꽃들이 캠퍼스를 장식한다. 그 중에서도 개나리와 연산홍 꽃이 만발하면 교정은 온통 꽃밭으로 바뀌어 학생들의 감탄사를 연발하게 한다. 필자는 학생들의 뇌리에 절대적인 아름다움의 이미지로 이 꽃들이 자리하기를 원한다. 세월이 가도 젊은 시절에 감상했던 꽃들을 바라보면서 좋은 추억을 간직한다면 대학생활이 아무리 힘들다 하더라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필자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벚꽃이 만발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인상의 무상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에 학교다운 시설이 없었던 지라 초등학교 시절부터 부안 읍네 가까운 큰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어려서 부모 곁을 떠나 조부모와 작은 집이 함께 살던 마을에서 지내게 된 것이다. 아무리 조부모나 작은 어머니가 장손이라고 잘 해주어도 어찌 부모 곁만 했겠는가. 저녁이면 밖으로 나와 고향의 신작로를 따라 피어나던 벚꽃길을 어머니와 함께 걷던 기억이 자꾸만 되살아나 눈물을 흘리곤 하였는데 그 것이 단순한 감상성이 아니라 시적 감수성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이제 필자도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아파트 주위와 천변을 따라 벚꽃이 만발하니 옛 생각이 절로 나는 것은 인지상정인 모양이다. 함께 모시고 사는 어머님의 나이가 팔십대 후반이라서 너무 연로하시고 허리가 꾸부정한 모습이 안타깝다. 대학의 일이나 대외적인 활동을 하느라 아들의 도리를 잘하지 못하고 세월만 흘러갔다. 요즘 젊은이들은 부모나 어른들에게 효도하려는 의식이 약하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어 부모가 돌아가시거나 연로하신 순간이 와야 비로소 후회하게 된다.
필자는 젊은 시절이 그리 길지 않으며 지금 만발한 벚꽃이 만개하는 기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을 깨닫기 바란다. 권불십년이요 화무십일홍이라는 오랜 진리를 간직하면 젊은이들은 인생의 순간순간이 귀중하게 인식된다. 이 봄은 정치의 계절이다. 천지가 아름답게 꽃이 피었는데 사람들의 마음은 속물화되어 아름다움을 깨닫지 못하고 이리저리 휩쓸릴 것이다. 박근혜 정권이 노인 복지를 공약으로 내걸었다가 예산부족으로 내팽개치는 것은 노인들을 더욱 소외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정치의 계절에야 노인들의 표를 노리고 찾아갈 것이다. 젊은 정치인들은 노인들에게도 아름다운 젊은 시절이 있고 정치행태에 대한 판단력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란다. 필자는 흐드러지게 핀 벚꽃을 바라보면서 늙으신 어머니에 대한 시를 적어보았다.
“어머니도 아름다운 적이 있었다/저 벚꽃처럼 /동백기름 바른 흑색머리칼을/정갈하게 빗고/신작로를 환하게 밝히며/걸어가곤 했다/고운 치마폭에 휩싸여/따라가던 수줍은 소년은/흰눈처럼 바람에 날리는/벚꽃을 황홀하게/보고 또 보며/꿈에 잠겼다/이제 늙어/꼬부라진 허리를 펴지도 못하는/어머니는/벚꽃 하얗게 떨어진 길을/비쩍비쩍 거리며/죽음을 향해 걸어간다/갈대보다 가벼운 어머니/손을 부여잡고/꽃길을 걷는데/떨어지는 눈물/벚꽃은 흐드러지게 피어 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