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歷史)를 훑어보면 선정(善政)과 선교(善敎)라는 말을 놓고 고심(苦心)하지 않을 수 없다. 왜 역대 제왕(帝王)들이 선정과 선교를 놓고 고심했겠는가? 선정과 선교가 성군(聖君)으로 가는 길에 두 축(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민심(民心) 잡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백성들을 부자(富者)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선정은 정치를 잘 한다는 것이고 선교는 백성을 잘 가르친다는 것이다.
정치를 잘 한다는 것은 잘 다스린다는 것이고 잘 가르친다는 것은 백성을 잘 교화(敎化)시킨다는 것이다. 이처럼 미리 가르쳐주지도 않고 법망(法網)이라는 그물을 쳐놓고 걸려들기만을 기다리는 것은 정교(政敎)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예로부터 선정은 재물(財物)과 관계가 깊은 것이고 선교는 민심(民心)과 관계가 깊은 것이다. 맹자(孟子)가 말하는 이유이다. “선정을 하면 백성들이 재물을 얻게 되고(善政得民財) 선교를 하면 민심을 얻는다(善敎得民心)”. 백성을 부유(富裕)하게 만드는 경제정책(經濟政策)이 선정이고 백성이 아무 걱정 없이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하는 문화정책(文化政策)이 선교란 이야기다.
예나 지금이나 재물과 민심은 나라를 지탱해 주는 두 축이다. 그래서 지금도 선정과 선교를 말하는 것이다. 온 국민이 잘 살 수 있도록 정치를 잘 하자는 것이고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학생들을 잘 가르치자는 것이다.
한발 물러서서 바라보면 선정은 항산(恒産)과 관계가 깊고 선교는 항심(恒心)과 관계가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항산은 먹을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선은 배불리 먹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라 하지 않았는가? 배가 부르고 근심걱정이 없어야 민심이 안정되는 것이다. 항심이 유지(維持)되는 것이다. 지속(持續)되는 것이다. 항산은 재물에 기인(起因)하고 항심은 민심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시각에서 보면 선정이 경제정책 같은 물질(物質)에 관한 정책이라면 선교는 교육 문화 같은 정신세계(精神世界)에 관한 정책이다.
맹자는 선정보다 선교를 더 높게 평가했다. 왜 그랬을까?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정신(精神)이 우선이라는 것이고 둘은 다스리기 전에 먼저 가르쳐야 효율(效率)이 높다는 것이다. 정신이 우선이라는 것은 가치관(價値觀)을 말하는 것이다. 정신이 존재를 규정하느냐? 물질이 존재를 규정하느냐? 하는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가치관을 어디다 두느냐 하는 것이다. 물론 먹어야 산다. 그렇다고 ‘먹는다는 데만 무게를 둔다면 개 되지나 다를 게 무언가?’라고 묻는 것이다. 효율을 말하는 것은 스스로 다스릴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배워서 안다면 스스로 다스릴 수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지배를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세간에 왜 말이 많은가? 배를 굶주려서인가? 아니다. 말 좀 하자는 것이다. 정[政治]을 하자는 것이다. 나도 좀 다스려보자는 것이다. 정(政)의 자리에 서 보자는 것이다. 정(政)의 자리에 서고자 하는 사람들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 있다. ‘지위가 없음을 걱정하지 말고 지위에 서게 할 것을 걱정하며 자신을 알아주는 이가 없음을 걱정하지 말고 알려질 만한 사람이 되기를 희구(希求)하라.’ 정(政)의 자리를 욕심내기 전에 선정(善政)의 길을 간 사람들의 삶을 돌아보라.
‘칼을 팔아서 송아지를 산다’는 뜻의 매도매독(賣刀賣犢)의 고사를 낳은 발해(渤海) 태수 공수(龔遂)의 이야기나 ‘팔배나무를 사랑한다’는 뜻의 감당지애(甘棠之愛)의 고사를 낳은 주무왕(周武王) 때 소공(召公)의 이야기나 ‘곡산의 선정이 정약용의 목숨을 건졌다’ 뜻의 사자성어를 낳은 곡산구정(谷山救丁)의 이야기나 ‘곽급이 지나간다는 말을 듣고 수백 명의 아이들이 竹馬를 타고 나와서 환영했다’ 뜻의 곽급죽마(郭伋竹馬)의 이야기는 모두 선정과 선교가 어떠했는가를 말해준다. 정의 자리를 넘보는 사람들이 한번 짚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