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우리사회는 내적으로 봉건사회 특유의 수탈이 자행되었으며, 신분제도의 폐지나 체제변화를 원하는 백성들의 저항을 받기도 했으며, 밖으로는 서구열강의 침략과 도전을 받아서 전면적인 위기에 직면했었다.
이시기에 조선은 내적으로는 경제적 내핍과 정치·사회적 모순을 극복해야 했고, 밖으로는 외세의 침략을 대응해야 하는 내우외환에 봉착하였을 때, 화서학파는 중화(中華)와 양이(洋夷)를 엄정하게 구분하는 ‘척사론’을 주장함으로써 개화기 최초의 위정척사학파로 자리 잡게 된다.
화서학파가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고 우리나라 근대민족운동을 대표하는 최고의 맥으로 정착했던 이유는, 세속의 권세에 영합하지 않았던 화서 이항로의 완고함과 이어지는 중암 김평묵의 노력과 화서문인들의 강력한 현실 참여가 있었기에 가능했었다.
화서의 학설은 당시 정통보수 산림세력이었던 매산학파에게 계속공격을 받았지만, 병인양요 이후에 척사운동과정에서 화서학파가 여론의 주도권을 잡게 되고, 위기감을 느낀 매산학파는 전우(田愚)의 해박한 성리학 지식과 예리한 표현으로 화서학파를 공격하였다.
하지만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黙)은 화서를 옹호하는 명확한 해명으로 양명학으로 공격하려는 의혹을 불식시키며 내부결속을 다지면서 척사위정을 전개하면서 정국을 주도했고, 외세의 침탈에 항거하는 유생들의 연명상소운동에 동분서주했다.
이에 대해 후배이며 제자였던 최익현이 쓴 중암의 제문에는 “선사에게 무례함을 보면 새매가 새를 쫓듯이 하였다. 처음에는 귀양 가는 화를 입었고, 두 번째는 제자의 배반을 당하는 액운이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외세와 맞서 싸우다 목숨마저 위태롭다가 마침내는 유배를 떠야 했던 중암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한편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은 화서문인 중에서 가장 높은 관직에 오른 실천가로서, 19세기 중엽의 나라가 혼란스럽던 23세에 명경과에 급제하였고, 대원군의 실정을 비판하는 상소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으며, 다시 대원군의 권력남용을 통렬히 비판하는 계유소(癸酉疎)를 올려 결국 대원군을 하야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1876년 1월 23일 일본과의 병자수호조약 체결에 반대하는 ‘지부복궐소(持斧伏闕疏)’ 올렸으며, 도끼를 들고 광화문 앞에 꿇어 앉아 일본과의 조약을 결사반대 하는 상소를 올리며 강력한 충의의 실천했을 때는, 홍재구(洪在龜), 유기일(柳基一), 유인석(柳隣錫) 등 50인도 같은 장소에서 연명유소를 올렸고 그 배후에는 중암 김평묵이 함께 하고 있었다.
결국 제주도에 이어 흑산도로 유배의 길을 떠나야했고, 그 후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단행되자 ‘내목을 칠지언정 내 몸의 터럭하나도 건드릴 수 없다.'고 강력한 상소를 올렸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74세의 노구를 이끌고 무성서원에서 항일의병을 일으켜 극렬하게 저항하며 국권수호와 위기극복에도 앞장섰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대마도에서 단식으로 항거하다 병사했다.
또한 용서(龍西) 유기일은 부친이 왜인이 국정을 농락하자 녹을 받지 않고 사퇴한 것에 분노하여 화서의 출중한 문인이었음에도 출사하지 않았으며, 중암 김평묵의 소개로 양평 벽계에 화서 이항로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전수하였으며, 1868년 이항로 사후에는 그 적전(嫡傳)을 계승한 김평묵을 사사함으로써, 화서와 중암의 학문과 사상에 깊이 경도되었고 동문 선배로 동향이던 면암과 중암의 사위였던 춘천의 동문 홍재구 등과 일생토록 두터운 교분을 가지기도 했다.
특히 병자연명유소에는 제일 먼저 이름을 올리는 소수에 추천되기도 했으며, 심설논쟁 때에는 철저하게 중암을 지지했고, 단발령을 선포하였을 때에는 향교의 유생들의 집회에서 통곡을 하며 반대하고 성토하였다가 면암과 함께 체포되었으나 극렬하게 저항 했으며, 스승과 조상에 대한 지효(至孝)의 표상으로 후세에 귀감이 되고 있다.
이런 민족주의사상은 민생민본의 위민의식에서 출발한 것이었으며, 19세기 중엽 국내외의 격변하는 시대적 사회현실을 올바로 인식하고 과감하게 행동으로 맞서 결국은 항일의식으로 무장하여, 적극적인 구국활동(救國活動)으로 전개된 상소운동과 항일의병투쟁(抗日義兵鬪爭)이 민족운동(民族運動)으로 발전해 가는 방향을 확실히 제시하였다.
그러므로 중암 김평묵은 화서사후에 화서학파의 종장(宗匠)으로, 면암 최익현은 최고의 실천가로, 용서 유기일은 의리를 지키는 후원자로서 나라의 정통성과 정신을 지켰던 의인임이 분명하고 그 중심에 포천의 선비들이 있었다.
최근 과거사(過去事)에 대한 일본 각료들의 잇따른 망언과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추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외세의 침탈에 항거하는 구국운동과 의병활동으로 생명을 바친 화서문인의 애국애민의 정신은 여러 번 강조하여도 지나치지 않는 자존의 표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최근 경제적으로 어려움과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잇따른 망언과 한반도 주변의 심상치 않은 긴장상황 속에서,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고 동아시아에서의 주도권을 유지하려는 미국에 의해 핵심 파트너로 선택받은 일본은, 헌법까지 개정해서 집단자위권을 확보하며 노골적으로 군사대국화를 추진하고 있는 모양새다.
이런 움직임 속에서 이미 외세에 침탈에 의해 국권을 상실했던 우리에게는 일본이 군국주의를 부활시키려는 새로운 위기로 다가오고 있으며, 지정학적으로 대륙과 해양세력이 상호 힘의 역학관계가 작용해 왔던 작금의 현실로 볼 때, 조선말 개항 전후 서세동점(西勢東漸)에 위기상황에서 척사위정(斥邪衛正)의 정신으로 가장 강력한 저항을 주도했던 경기지역 화서문인들의 구국실천의 정신은, 오늘의 대한민국이 다시 새겨야할 분명한 자화상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진 어려움 속에서도 나라와 민족을 지키는데 온몸과 정성을 다 바쳤던, 경기지역 화서학파를 대표하는 포천출신 중암 김평묵선생과 면암 최익현선생 그리고 용서 유기일선생의 나라 근심하기를 내 집 걱정 하듯 하던 '우국여가(憂國如家)'의 정신을 본받아서, 겁 없는 불장난으로 군사대국화의 망령을 획책하고 있는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는 일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