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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용 칼럼] 한음 이덕형과 포천


이희용 기자 / heeyeong1@hanmail.net입력 : 2013년 11월 19일
↑↑ 이희용 칼럼니스트, 포천신문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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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형(李德馨: 1561-1613)의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쌍송(雙松)․포옹산인(抱雍散人)이다. 고려조 직신(直臣)으로 명성을 얻었던 이집(李集)의 후손으로 연산군 때 좌의정을 역임한 이극균(李克均)의 5대손이며, 선조 초기에 영의정을 지낸 아계 이산해(鵝溪 李山海)의 사위가 된다.

특히 이덕형의 생애에서 그동안 대부분의 연구는 본가의 내력에 치중하여 발표되었으나 그의 어머니가 태어난 경기도 포천의 자작리(自作里) 문화유씨 가문과 주변인물과 일화를 언급하고자 한다.

그의 외숙(外叔)은 조선조 개국원종공신 류만수(柳曼洙)의 6대손인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류전(柳琠)선생이고, 외조부 유예선(柳禮善)선생은 5형제가 한 울타리 안에 살면서 극히 우애로움이 본이 되어 나라에서 효우정려비를 내렸던 명문가로 포천사람이다.

예로부터 명가에서 인재가 나온다고 하여 이덕형도 출중한 인재였지만, 그의 외숙인 유전도 22세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23세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였으며 26세 때 중시문과(重試文科)에 또 급제하여 대과(大科)에 두 번씩이나 급제한 천재였다.

뿐만 아니라, 한음의 외숙부 유전선생은 병조판서와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을 역임하였고, 선조22년 전라도 지방에서 정여립(鄭汝立)이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반란평정을 명을 받고 관군을 급파하여 난을 평정하는 등 관직생활 38년간 모든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였으며, 동서 어느 붕당에도 가담치 않고 국정을 잘 이끌어 부정과 불의를 절대로 용납하지 않아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후에 나라에서 평난공신 시녕부원군(平難功臣 始寧府院君)에 추봉하고 문정(文貞)이라는 시호와 보통사람은 4대가 지나면 신주를 매혼하는데, 나라의 큰 공을 세운 사람을 매혼하지 않고 신위를 영구히 사당에 모시는 것을 나라에서 허락하는 불천지위(不遷之位)의 은전이 내려졌다.

그러니 한음이 뛰어난 지략과 외교술로 나라를 구해낸 역사의 위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는, 본가와 처가 그리고 덕망과 학식이 높았던 외가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니 과연 그의 외가도 대단한 명문이었다.

이덕형의 아버지는 지중추부사(정2품) 이민성(李民聖)이고 어머니는 문화유씨이다. 그는 1561년(명종 16) 2월 12일 서울 남부(南部) 성명방(誠明坊)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중기까지 남자가 결혼한 뒤 처가에서 아이를 낳아 자랄 때까지 일정 기간 살다가 본가로 돌아오는 혼인풍습인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의 영향이었다.

그의 가계에서 주목할 만한 사항은 16세 때인 선조 10년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의 숙부(叔父)이고 포천현감을 지낸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 큰 인물이 될 것이라며 추천하여 사위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14세 때에 영의정 출신 외숙부 유전선생의 포천 집에서 지내면서 글 잘하고 명필로 이름난 봉래 선생을 만났는데.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선생이 먼저 시를 쓰자 어린 한음은 시로 화답을 했으며, 봉래선생을 따라 영평(永平) 우두연(牛頭淵) 산수 간에 노닐면서 많은 시를 창화했는데, 술술 나오는 시가 갈수록 아름다워 마음을 감동시키는데 그때 지었다는 시의 내용은 이러하다.

‘넓은 들에 저녁 빛 엷게 내리고, 맑은 물에 산 그림자 가득하네. 녹음에 하얀 연기 일고, 풀언덕에 집이 두어 채. (野闊暮光薄 水明山影多 綠陰白煙起 芳草兩三家)’ 당시 조선의 시선(詩仙)으로 불리던 봉래선생이 이 시를 보고 '그대는 내 맞수가 아니라 내 스승이다'고 했다는 말이 전할 정도다.

이렇게 어린 시절부터 글 잘하기로 이름 높았던 이덕형은 18세에 생원시에 장원(壯元)하고 진사시에는 3등으로 급제하였고, 선조13년 20세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의 관원이 되었으며, 재주 있는 신하로 선발되어 선조임금으로부터 서적을 하사 받기도 했다.

이때 한음과 동방(同榜)으로 25세의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과 함께 급제하여 뒤에 율곡 이이의 추천으로 호당(湖當)에 들어가 1583년에 사가독서(賜家讀書)를 하였고, 이듬해 서총대(瑞葱臺)의 응제(應製)에서 수석에 선발된 이후로도 여러 차례 수석을 차지하였고, 옥당(玉堂)인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가 부수찬․정언․부교리를 거쳐 이조좌랑이 되었으며, 1588년 이조정랑으로서 일본사신 겐소(玄蘇) 등을 접대하여 왜인들에게도 존경을 받았다.

그리고 31세에는 예조참판이 되어 대제학을 겸하였고 이때 한음은 나이가 젊다는 이유로 대제학을 사양하였으나, 그의 인격과 학식의 높음을 고려해 임명되었으니 조선조 500년간의 유례가 없는 사례였다.

대제학은 판서의 지위로 학문에 뛰어나고 문장에도 능해서 만조백관의 추앙을 받아야만 그 지위에 오르기 때문에, 대체로 노성(老成)한 관료들이 발탁되기 마련인데 31세의 한음을 제수한 것은 그의 역량이 얼마나 탁월하고 학문과 문장도 뛰어났는지를 방증해 준다.

조선의 대학자인 사계 김장생(金長生)은 한음을 가리켜 “덕망과 문장을 갖추고 출장입상(出將入相)의 능력을 지녔던 인물로, 당파에 기울어지지 않고 공명정대한 처사로서 일관해 동서남북지인(東西南北之人)”이라고 평을 한 바 있는데 이는 외숙부인 류전선생의 경우와 다르지 않다.

이덕형이 조선왕조 최연소 대제학과 세 차례에 걸쳐 영의정을 지냈고 중국과 일본을 상대로 빛나는 외교를 펼쳤으며 1592년 32세의 대사헌으로 있을 때 임진왜란을 만나, 좌의정 서애 유성룡, 도승지 이항복과 더불어 탁월한 지략으로 국난극복에 혼신을 다했다고 하니 외가인 포천과의 인연이 특별하다고 할 것이다.

이 희 용
문화평론가, 향토사연구가, 대진대학교 박사과정원우회장, 한국스카우트경기북부연맹 이사, 전경기도예총부회장, 포천시수능시험장유치위원장, 포천신문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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