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국민이 기다리고 기대했던 남북 당국자회담이 무산되는 것을 보면서 이럴 때 황희 정승이 있었으면 어떻게 남북문제를 풀어 나갈까 궁금해지면서 이렇게 결렬되지는 않았을 것 같은 생각이 들며 그리워지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세종실록에는 황희 정승의 여러 가지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다. 매관매직을 했고, 자기 사위를 위해 조서를 위조하고, 사사로운 청탁을 받고 선처를 부탁하는 등 많은 문제점이 있었는데도 세종대왕은 청탁사건을 제외하곤 시종일관 황희정승을 감싸주었다.
세종대왕께서는 무엇 때문에 황희를 이처럼 보호하고 신임했을까. 40세 무렵까지 면직과 파직을 거듭하며 지방으로 전전하던 황희를 발굴한 것은 박석명이었다.
태종 이방원의 어릴 적 친구였던 박석명이 황희를 발탁한 것은,
첫째, 황희의 탁월한 사태파악 능력 때문이었다. 황희는 아무리 복잡한 사태도 그 핵심을 파악해 간단명료하게 정리해 내는 능력이 있었다. 국왕태종 스스로도 가끔 중심을 잃고 헤맬 때가 있었지만 황희와 상의하면 모든 것이 간단 명료해지고 분명해졌다. 황희는 태종에게 일의 우선순위를 설명하고 그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적합한 인재까지도 추천하곤 했다. 이러하니 태종은 황희를 단 하루만 보지 못해도 답답해하고 찾았다.
황희가 국왕의 신뢰를 받을 수 있었던 두번째 이유는 다양한 인재 발굴 능력 때문이었다. 초기에 외직을 전전하면서도 그는 궁궐 밖에 널려져있는 다재다능한 인재들과 만나 교류하며 두터운 신뢰를 쌓아놓았다. 그는 지신사(현 비서실장)가 된 다음에는 이러한 인재들을 적극 천거하고 활용했다.
현대처럼 시기하고, 모함하고, 견재하지 않았다. 무능한 자들은 설 자리가 없었다. 이들 중에는 나라에 큰 공훈을 남긴 조선의 예제를 정비한 허조, 여진족을 정벌한 최윤덕, 물시계를 만든 장영실 등을 추천한 것도 황희였고, 외직에 있을 때 만난 인재들이였다.
황희는 이렇게 말했다. “인재들이 길에 버려져 있는 것은 나라와 지방을 다스리는 사람들의 수치다.” 이렇게 생각하여 능력 있는 자라면 신분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천거하여 등용하여 일을 맡겼다. 이러하니 나라가 발전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현재 어느 지방도시는 시민들이 보아도 아무 실력과 능력이 없어 보이는데도 선거 때의 보답으로 자리를 차지하니 시민과 지방발전을 위해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황희의 가장 큰 세 번 째 공적은 국가의 중심추 역할이라고 하겠다. 그는 혁명과 건국과정에서 희생되고 소외된 사람들을 다독이고 조선왕조에 등을 돌리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하곤 하였다. 황희는 사관들에게 “자주 바꾸는 것을 크게 경계하고 좋아하지 않아 백성들을 안정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황희의 모든 공적은 황희를 신임하고 시종 중책을 맡겼던 세종대왕의 신임 때문이었다. 세종대왕은 국왕의 정책노선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비판해주는 황희의 조언을 최대한 수용하고 정책에 반영했다.
황희의 정적이었던 하륜, 조말생 등의 공격에서도 세종대왕은 황희를 지켜주었다. 황희 역시 세종대왕에게 보답하려고 청빈한 정승으로서 보필했다. 실로 황희가 세종대왕 때문에 청백리로서 역사에 남았다면, 세종대왕은 황희의 도움으로 동방의 찬란한 성군이 될 수 있었다.
황희는 정승으로서 나라의 온갖 일을 자기책임으로 여기고 섬세한 저울추처럼 국왕과 신하 사이를 오가면서 중용의 정치를 지켜나갔다. 지금 한민족인 남북이 대립하고 핵무기로 위협하는 북한 3대 세습 독재정권과 마주한 이 상황에서 황희 정승이 그리워지는 것은 무슨 연유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