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루성의 역사를 밝히는 지상 학술세미나가 지난 9월 16일 포천시 소흘읍 고모리 소재 물꼬방에서 개최됐다. 이날 오후 1시부터 3시까지 두 시간 동안 열린 세미나는 서병국 대진대 사학과 명예교수(발해사, 고구려사)가 주제발표를 했으며, 이근영 대진대 국문학과 교수(국어학)가 지정토론자로 나섰다.
서병국 교수는 주제발표에서 “문헌조사, 현지답사, 고고학적ㆍ언어학적 접근 등 종합적으로 살펴 본 바에 의하면 고모루성은 고모리산성설이 가장 유력하다”고 밝혔으며, 이근영 교수는 지정토론에서 “여러가지 언어학적 분석이 있으나 ‘고모+모루’에서 중복되는 ‘모’가 탈락하여 ‘고모루>고모리’가 되었다는 이 분석이 가장 타당한 것으로 본다”며 뒷받침했다.
우리나라의 歷史像 國際學(역사상 국제학)을 이룬 몇 안 되는 것 중의 하나가「好太王陵碑學(호태왕릉비학)」이다. 국제적 관심을 모으게 된 것은 호태왕이 고구려의 국왕으로서 영토를 가장 크게 확장한 치적이 『삼국사기』에도 수록되지 않은데다 이「陵碑(능비)」를 고구려 사람들이 직접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능비」에 수록된 고구려의 영토 확장 기사에 대해 연구자들은 많은 의미를 부여하였으며 그 기사를 귀중하게 여기고 있다.「능비」의 영토 확장 기사를『삼국사기』에서 볼 수 없다면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호태왕의 영토 확장 기사는『삼국사기』에도 실려 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능비」의 영토 확장 기사가 과장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능비」의 가장 중요한 대목은 호태왕이 永樂(영락) 6년에 백제의 58개성과 700개의 촌락을 군사력을 동원하여 점령했다는 것인데 『삼국사기』의 영토 확장 기사와 비교 검토한 결과 58개성과 700개의 촌락은 영락 6년 한 해에 모두 점령한 것이 아니고 호태왕의 즉위 원년, 2년, 3년, 4년에 걸쳐 점령한 모든 성들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야 온당하다.
『삼국사기』는 호태왕 시기 백제와의 소규모 전쟁까지 다 수록했는데 58개성과 700개의 촌락을 뺏었다는 것은『삼국사기』에 실려 있지 않다. 그것은 같은 해에 점령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삼국사기』 辰斯王(진사왕) 8년(392) 10월조를 보면 700개의 촌락과 관련이 있어 보이는 듯한 기사가 있다. 즉 진사왕은 고구려왕 談德(담덕, 호태왕의 이름)이 용병에 능함을 알고 싸우려하지 않아 북쪽에 있는 백제의 부락이 거의 고구려 군에게 함몰됐다는 것이다.
이는 영락 6년에 고구려가 58개성을 동시에 점령했다는「능비」의 기사를 의심케 한다. 58개성의 위치는 전부 파악되고 있지 않다. 그 중의 하나인 古牟婁城(고모루성)의 이름은「中原高句麗碑(중원고구려비)」에도 실려 있어 고모루성의 위치문제가 흥미를 더해준다. 지금까지 논의되고 있는 설은 (1)충북 음성의 高山城說(고산성설), (2)충남의 德山說(덕산설), (3)경기 포천의 古毛里山城說(고모리산성설)이다.
58개성이 모두 백제의 성이므로 고모루성이 있는 포천은 백제의 관할지역이다. 백제 이전에는 이곳이 馬韓(마한)의 동북 모퉁이 땅 이었다가 백제의 건국으로 백제의 영토로 편입됐다. 백제의 건국 초기 포천 등 동북 변경 일대의 성들은 婁(루)자로 많이 표현되고 있다. 또한 백제의 왕중에는 多婁王(다루왕)ㆍ己婁王(기루왕)ㆍ蓋婁王(개루왕) 등 婁자로 표현된 왕도 많다. 이는 婁자의 사용이 백제사회에서 보편화됐음을 뜻한다. 고모리는 고모루의 변형된 지명이라고 봐야할 것 같다. 우리나라의 경우 원래의 지명이 변형된 사례가 매우 많다. 특히 일제 강점기 민족정기 말살정책으로 전국적으로 변형된 지명이 허다하다. 고모리도 이의 한 뚜렷한 예라고 본다.
『東國輿地勝覽(동국여지승람)』(포천편)에는 고모리란 지명과 고모리산성이 소재한 老姑山(노고산)이란 지명도 없다. 그런데도 고모리산성(노고산성)을 고모루성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일부 견해가 있다. 고모리산성이 土城(토성)임을 또한 하나의 이유로 내세우고 있다. 토성은 보통 일시적 방어목적에서 축조됐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는 하다. 고구려의 유명한「千里長城(천리장성)」도 분명 토성이다. 하지만「천리장성」의 군사적 가치를 낮게 보지 않는다. 58개성의 위치가 밝혀지지 않아 석성인지 토성인지 가리기가 쉽지 않다.
고모리산성(노고산성)이 토성이라고 해서 고모루성이 아니라고 주장할 근거는 설득력이 미약하다. 백제의 수도인 漢城(한성)과 阿且城(아차성)도 엄연한 토성이라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포천 관내에는 지금도 모루란 지명이 많다. 말했듯이 포천은 마한의 동북 지방이므로 모퉁이(모루)같은 땅이었다. 온조는 말갈의 침입을 막는다는 조건으로 도읍지로부터 북쪽으로 100리의 땅을 마한왕으로부터 받았다. 때문에 이 땅은 백제시대에도 모퉁이로 통용되어「능비」에서 보듯이 牟婁(모루)ㆍ古牟婁(고모루)ㆍ臼模婁(구모루)ㆍ各牟婁(각모루) 등 모루(로)라고 표현된 성들의 이름이 나왔다고 해야 할 것이다.
비득재 관문을 지키는 백제의 요새가 지금의 고모리 산성 즉 고모루성이라는 것은 최근 필자가 이 산성에서 수습한 다량의 각종 토기편이 모두 계통상 백제의 몽촌토성의 그것과 일치하며 또한 경기도 박물관에서 발굴한 포천시 자작동 백제 주거지에서 나온 백제의 토기 양식, 문양과도 일치하고 있다는 것이 움직일 수 없는 물증이다. 결국 필자가 문헌조사, 현지답사, 고고학적ㆍ언어학적 접근 등 종합적으로 살펴 본 바에 의하면 고모루성은 고모리산성설이 가장 유력하다고 본다.
↑↑ 이근영 대진대 국문과 교수 지정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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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영(토론문) / ‘고모루성’과 ‘고모리’의 지명 관련성에 대하여
본 토론문은 古牟婁城(고모루성)에 대한 역사적 사실(증거가 될 만한 사료나 유물 등)을 고려하지 않은 상태에서, 언어학적으로 이 지명에 대한 기존의 연구를 종합하여 작성한 것이다. 이 내용을 위하여 참고한 자료로는, 백제어의 지명 연구에 대한 가장 훌륭한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는 도수희 교수의 백제어 연구를 바탕으로 삼았다(도수희(1987, 1989, 1994),
또한, 우리말 땅이름에 대한 많은 글을 쓴 배우리 전 한국 땅이름학회 부회장의 저서(배우리(1994)의 내용을 바탕으로 삼았다. 기타 고대 지명과 인명의 연구에 관한 다양한 참고 서적은 다음과 같다. 최남희(1999, 2005), 천소영(1990), 유재영(1982), 강병윤(1997).
고모리의 지명 유래는 포천문화원(1993)의 향토문화유적사료집(제2집), 지명유래집에서 보이는 ‘늙은 고모님을 모시고 살았다’에서 姑母, ‘고모가 죽자 묘를 썼다’에서 ‘고묘>고모’ 등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구전을 채록해 놓은 것으로 언어학적 의미를 둘 수 없다.
고모리는 여러 가지로 분석할 수 있다. 우선, ‘고+모리’로 분석해 보면 ‘-모리’는 포천에 많이 산재한 ‘-모루’라는 뜻으로 보아 같은 ‘마을’ 또는 ‘산’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고모리는 고모루와 같은 땅이름이라고 보는 것이다. 또, ‘-모루’, ‘-모리’, ‘-머리’ 등은 고대 국어에서 같은 어원에서 출발한다고 본다. 어원을 ‘’에 두고 있는 이것은 ‘꼭대기, 위’라는 의미를 갖는다(>말>몰>모리,모루>모이>뫼(山)). 그렇다면, ‘고-’의 의미는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그래서, ‘고모+리’로 분석하여 보면, 고모(姑母)는 ‘(한+뫼>한미>)할미’의 한자어로 볼 수 있다. 이 때 老姑는 姑母와 같은 의미의 한자다. 그런데 ‘고모’를 ‘>곰>고모’의 변화로 이해할 때 곰내(熊津), 고모재(古毛峴)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 지명으로 사용하고 있는 많은 지명들의 어원을 알 수 있게 된다[> 감(가마, 가무, 가매, 가미...) : 감골(甘谷, 柿谷) / > 검(거모, 거무, 거마...) : 검단(檢丹), 검골(감골) / > 곰( 고모, 고마,고매, 고미...) : 곰개(熊浦) > 공개(孔浦리) / > 금, 굼 (그무, 구무, 구매...) : 금실(金谷), 금골(琴谷)]
마지막으로, ‘곰(고모)+모루(모리)’로 분석하는 것인데, 결국 ‘곰모루>고모모루>고모루>고모리’의 변화로 보는 것이다. ‘고모+모루’에서 중복되는 ‘모’가 탈락하여 ‘고모루>고모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분석이 가장 언어학적으로 타당한 것으로 본다. 따라서 ‘고모루성’과 ‘고모리’는 이상의 연구에 의하면 언어학적인 관련성이 분명하다고 본다.
● [질의 응답]
↑↑ 사회를 맡은 홍을표 포천미래포럼 홍보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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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을표(질의)
주제발표에서 고모리 산성이 고모루성이라는 주장의 근거로 광개토대왕능비의 백제 58성 700리에 나타난 고모루성이 백제성이라는 것, ‘모루’ 및 ‘루’ 등이 백제어라는 것, 고모리 산성에서 다량의 백제 유물이 발굴되었다는 것 등을 제시했는데, 이들 근거들은 고모리 산성이 백제성이라는 확실한 증거는 제시하나 그것이 고모루성이라고 주장하는 직접적인 증거는 되지 못한다고 본다.
또한 주제발표에서 고구려가 백제를 침범할 때 수군을 동원하여 강뿐만 아니라 해안으로도 침투하게 되어 점령지역이 광범위한 지역으로 확대될 수 있다고 하여 결과적으로 고구려가 점령한 백제성 58개가 충남지역까지 나아갈 수 있다고 했다. 포천의 고모리 산성이 고모루성이라는 주장에 의문이 생기는데 이에 대한 설명을 부탁한다.
▶ 서병국(답변)
이미 설명한 바 바와 같이 58개성이 모두 백제의 성이므로 고모루성이 있는 지역은 백제가 관할했던 지역이다. 백제 이전에는 馬韓(마한)이 지배했는데 포천지역은 마한의 동북 모퉁이 땅이었다가 백제의 건국으로 백제의 영토로 편입됐다. 그래서 포천지역에는 ‘모루’라는 지명이 다른 지역에 비해 유독 많다. 조사한 바에 의하면 약 50여개나 된다고 한다. 다른 지역에도 간혹 모루라는 지명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지만 포천지역처럼 전 지역에 산재하여 나타나는 예는 없다. 따라서 포천지역은 작은 동네의 모퉁이가 아니라 마한과 같은 큰 규모의 부족국가의 중심에서 볼 때 변방 지역을 지칭한다는 의미가 된다.
모루라는 지명이 유독 많이 나타나는 지역이 백제의 건국 초기 포천 등 동북 변경 일대의 성들은 婁자로 많이 표현되고 있다. 또한 백제의 왕 중에는 多婁王ㆍ己婁王ㆍ蓋婁王 등 婁자로 표현된 왕도 많다. 이는 婁자의 사용이 백제 사회에서 보편화됐음을 뜻한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는 말갈의 침입을 막는다는 조건으로 도읍지로부터 북쪽으로 100리의 땅을 마한왕으로부터 받았다. 때문에 이 땅은 백제시대에도 모퉁이로 통용되어「능비」에서 보듯이 牟婁ㆍ古牟婁ㆍ臼模婁ㆍ各牟婁 등 모루(로)라고 표현된 성들의 이름이 나왔다고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고모루성의 ‘모루’는 이 지역의 지명에 많이 나타나는 ‘모루’라는 지명과 동일하므로 포천의 고모리 산성을 고모루성으로 볼 충분한 사유가 된다고 하겠다.
▶ 홍을표(질의)
이 지역에서는 고모리 산성이 노고산에 있는 산성이므로 고모루성이라고 부르는 것에 반대하고 노고산성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토론발표에 의하면 고모는 姑母로 老姑와 동일한 의미가 되므로 노고산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알 수 있게 된다. 그간 노고산에 대한 의문이 많았는데 이것의 출처를 알 수 있게 되어 매우 기쁘다. 이에 대한 설명을 바란다.
▶ 이근영(답변)
‘고모’가 ‘>곰>고모’의 변화의 결과라는 것은 이미 밝혔다. 그런데 우리 신화에 나타난 바와 같이 곰 신앙에서 웅녀(熊女)는 숭배의 대상이다. 곰을 姑母, 老姑 등의 한자로 표기하는 데는 우리 전통의 여성신(神) 숭배사상이 반영되어 있다고 본다. 우리 고유의 언어가 후대에 변화되는 사정에는 여러 가지 사정(유교적인 한자문화, 일제의 우리말 말살정책 등)이 개입될 수 있는데, 그러므로 이름에 대한 엄밀한 언어학적 고찰이 전제되지 않은 섣부른 판단은 많은 통속적인 해석을 양산하여 언어적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
‘솔모루>松隅里’의 해석에도 엄밀한 고찰이 필요하다. 우리말 ‘솔+모루’에 대한 잘못된 해석(솔(소나무), 우리(모퉁이))에서 ‘송우리’라는 표기가 나타났을 수 있다. ‘솔(나즈막한)+모리(산)’가 언어학적으로 바른 해석이다. 송우리에 옛날에는 소나무가 많이 있었는데 전쟁 때 불타서 없어졌다는 해석이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사실 우리말을 한자어로 변경하여 표기할 때 생길 수 있는 오류다. ‘>곰>고모’의 변화에서 고모가 姑母, 老姑 등의 한자로 표기되는 것은 언어학적인 문제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여성신숭배사상의 반영이라는 문화적 맥락은 알 수 있게 해준다는 데 얼마간의 의의는 있다고 하겠다.
▶ 홍을표(질의)
죽엽산과 고모리 산성 사이의 고개가 발표문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고대의 남북 통로의 요충지인 비득재다. 이곳을 확보하는 것은 군사전략상 긴요한 일이므로 마한 때 산성을 쌓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포천지역은 상고 시대 이래로 전략상 매우 중요한 지역이 분명한데 이 지역의 지정학적 위상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설명을 부탁한다.
▶ 서병국(답변)
고모리 산성 즉 고모루성의 중요성은 성 밑에 소재한 남북통로인 비득재 고갯길에서 찾을 수 있다. 비득재는 鐵原(철원)과 漢江 北岸(한강 북안)을 잇는 중요한 군사 요충지이므로 호태왕의 백제 남하 시에 이 루트를 이용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힘들다. 역사상 비득재는 강원도의 平康(평강)ㆍ철원에서 남쪽의 아차산으로 이어지는 최후의 관문이므로 일제강점기 일본군은 이 길을 이용했으며 중공군도 남침 시에 이를 이용했다고 한다.
▶ 홍을표(질의)
고모리 산성과 천보산 사이를 막고 있는 장벽인 축석령의 옛 이름이 ‘빈돌고개’라고 하는데 지명의 유래에 대해 설명을 바란다.
▶ 이근영(답변)
축석령은 빌 祝(축)자, 돌 石(석)자, 고개 嶺(령)자인데 옛날 이 험한 고갯길을 넘던 길손이 돌을 호랑이로 잘못보고 살려달라고 빌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호랑이 다닐 정도로 험한 길이었음이 이 이야기에서 알 수 있다. 그래서 인근의 비득재를 주요이동통로로 사용했을 것이다. 참고로 비득재의 ‘비득’은 ‘비둘기’의 옛말이다. 비둘기고개인 것이다.
▶ 홍을표(마무리)
오늘 세미나를 통하여 포천의 고모리 산성이 광개토대왕능비의 고모루성이라는 주장의 역사적 및 언어학적인 근거가 확연하게 밝혀졌다고 생각한다. 능비의 백제 58성과 700리의 위치가 백제 땅이고 그 중 고모루성이 포천인 근거는 ‘모루’라는 지명이 포천에 유독 많다는 것, 백제 유물이 다량 출토되었다는 것 등과 무엇보다도 ‘고모리’와 ‘고모루’의 언어학적 관련성이 결정적인 증거로 밝혀졌다. 이로써 이곳을 포천의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새롭게 정립하고 이곳의 역사 문화적 가치를 지역의 문화 발전에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오늘 세미나가 이곳 지역을 문화마을로 만들고자 하는 계획의 일환으로 개최되는 ‘수목원가는길 2011’의 성공적인 추진에 크게 기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훌륭한 주제발표와 토론을 해주신 두 분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와 존경을 표하면서 세미나를 마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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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승 소흘읍 주민자치위원장(수목원가는길 2011 공동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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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모리 산성을 찾은 서병국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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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 이상창 기자 / lscnews@hanmail.net 촬영 : 김명일 기자 / mi73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