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시민들은 열병처럼 사회정의를 추구하다가도 일상의 무게가 커갈수록 목소리를 높여서 외치던 정의를 건망증의 탁류에 흘려보내고 만다. 하지만 어떤 사건을 계기로 그 열병이 되살아나 무의식 속에 가라앉힌 정의란 샘물을 다시 솟아나게 한다. 몇 년 전 미군에 의한 미순이.효순이 사건이나 광우병 관련 소고기 수입에 대한 촛블 시위에 수많은 시민들이 창여했던 것은 정의감의 휘발성에 대한 좋은 본보기이다. 40~50대의 기성세대조차도 장롱 속에 넣어 두었던 정의의 깃발을 꺼내들고 거리에 나왔지 않았던가.
공지영은 『도가니』라는 작품에서 강인호와 서예진을 통해서 사회정의에 대해 다시 정의하고자 한다. 강인호는 중국에서 의류사업을 하다가 도산하여 실업자로 전전하게 된다. 그는 아내의 친구의 소개로 무진에 있는 농아학교에 교사로 부임한다. 평범한 교사로서 새 출발했던 그는 첫날부터 심상치 않은 일에 휘말리게 된다. 그는 아내가 소개한 이 직장은 학교발전기금이란 명목으로 교사직을 매관매직하는 비리를 관행화하고 있으며, 5천만원을 교장이나 행정실장에게 상납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농아학생들은 교사에게 수시로 구타를 당하며, 화장실에서 비명소리가 들려도 의도적으로 무관심하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란다.
강인호는 부임 첫날부터 겪었던 일들이 교장, 행정실장, 생활지도교수들이 어린 학생들에게 상습적으로 가하는 변태적 성폭행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고 경악한다. 그는 무진인권센타 간사로 일하고 있는 대학선배 서예진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러나 그들이 경찰서, 교육청, 시청에 고발을 해도 어찌된 일인지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 분개한다. 교장 이강복이 대형교회 장로이고, 곳곳에서 권력을 휘두르고 있어 진실을 파헤치고 정의를 구현하는 것은 요원한 일임을 깨달을 뿐이다.
결국 그들은 방송매체를 동원하여 전국적으로 여론화시켜 구속시키는데 성공하지만 피해 당사자들의 부모를 매수하여 합의를 하게 됨으로써 재판 자체가 무용화되는 아이러니를 느끼고 사회의 부조리에 치를 떨게 된다.
사회가 결코 정의의 편에 서지 않는 것은 강인호 같은 의인들을 좌절하게 한다. 강인호 자신도 자본주의의 최대 가치인 돈을 추구하다가 실패한 자이다. 학생시절의 추구하던 정의라는 가치를 망각하고 살다가 이강복 같은 권력자의 불의를 보면서 잊었던 정의의 깃발을 다시 꺼내게 된다. 그러나 그는 정의를 완벽하게 실현하기에는 벅차 보인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이 그의 발목을 붙드는 것이다. 정의에 대한 그의 불길은 불의와 타협하는 세력들에 의해서 점점 사그라질 수밖에 없다.
강인호의 젊은 시절에 있었던 연애사건, 전교조 관련 전력을 파헤쳐 사회적으로 매장하려는 음모가 지속되고, 아내로 하여금 이 일에서 손을 떼도록 종용을 받는다. 결국 강인호는 서예진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천막농성 철거를 막는데 협력하지 못하고 아내와 함께 서울로 떠나고 만다.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제자들에 대한 끝없는 연민에도 불구하고 개혁을 거부하는 사회에 손을 드는 패배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반면에 인권센타 여간사 서예진은 끝까지 사회정의에 대한 가치를 위해 투쟁하는 면모를 보여준다. 공지영은 서예진을 통해서 힘이 없지만 각성된 여성이 사회 개혁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지역사회의 작은 이권에 급급해서 진실한 쪽에 서지 못하고 불의와 타협하고 야합하는 모습을 종종 목격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철옹성과 같은 부도덕한 세력에 대해 달걀로 바위치기라는 패배주의에 빠져있지 않나 반성해야 한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답시고 곳곳에 사회복지 시설이 들어서고 있다. 그들은 겉으로는 그들을 위해서 손을 내미는 테레사 수녀의 이미지로 가면을 쓰고 있지만, 내적으로는 약자들을 이용하고 이권에 눈이 먼 자들임을 신문지상에 너무 많이 드러나고 있다. 참으로 개탄할 일이다.
부패의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사회에서 우리의 후대들이 살아가게 해서는 안되지 않은가. 서예진과 같은 각성된 자들을 많이 육성해야하고 적어도 우리가 그들에게 돌을 던지는 위선자가 되지 않도록 마음을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