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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조문학 공모] 독서감상문 일반 최우수作 - 백 년 동안의 울림


포천신문 기자 / ipcs21@hanmail.net입력 : 2010년 11월 16일
 
ⓒ (주)포천신문사 
담론이 늘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어릴 적 내가 목격한 어른들의 반상회는, 시급한 현안에 대해 논하는가 싶다가도 이내 어느 집 뒷담화로 이어지기 십상이었다. 어른이 되어 만난 담론들도 매한가지였다. 두세 사람만 모이면, 거기에 없는 지인이나 연예인, 혹은 정치인들을 무작정 비난하며 어설픈 동질감을 누리려는 비난의 모습을 쉽게 목격할 수 있었다. 아마도 비판적 담론인 토론의 정의를 잘못 이해했을 공산이 클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오해는 때로 토론의 장을 토로의 그것으로 전락시킨다. 이 소설에 친절하게 붙어 있던 ‘토론 소설’이란 분류가, 조금 미심쩍게 느껴진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올 여름, 나는 이 작품을 연극으로 먼저 접했다. 물론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설핏 스친 기억은 있다. 그러나 본문에 대한 여실한 이해 없이, 그저 ‘이해조의 <자유종>은 신소설’ 정도로만 암기하고 끝낸 단편적인 지식에 불과했다. 게다가 연극은 스르르 졸음이 돌만큼 꽤나 지루했다. 그래서 이 책을 열기 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진한 커피부터 한 잔 마셔야 했다. 이제와 생각하면 다분히 기우였지만 말이다. 책을 다 읽어낸 지금, 소설은 역시 소설로 읽어야 맛이구나, 싶어진다. 이 책의 문장들이, 국어시간이나 연극의 지루함과는 사뭇 다른 담론의 즐거움으로 나를 안내해주었기 때문이다.

신기했다. 오래된 신소설이 재미있게 읽힐 줄은 몰랐다. 이상한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마치 음악처럼 흥얼흥얼 읽혔달까. 이 책을 읽는 동안, 내 귀에 아슴아슴 들려오던 환청이 있었다. 리스트의 <라 캄파넬라>가 그것이다. ‘작은 종’이란 뜻을 가진 피아노곡인데, 은밀한 듯 시작해 때론 세심하게, 때론 격정적으로 흐르던 건반의 움직임이 이 소설의 담론과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이 소설이 구태의연한 구소설의 형식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신소설‘이란 말은 구소설이라는 기존의 형식에 대응해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구(舊)를 전복케 하는 신(新)이란, 언제나 과도기의 성질을 지닐 수밖에 없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말처럼, 무엇도 완전히 새로울 수는 없는 것이다. 신소설은 당시의 계몽주의가 만들어낸 소산이었다. 때문에 작가는 고심했을 것이다. 보다 새로운 사상을 어떻게 하면 보다 쉽게 전달할 수 있을까, 하고. 솔직히 처음에는 형식이 새롭지 않은데 어떻게 신소설이라 할 수 있냐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뚝배기 보단 장맛이라고, 신구의 여부는 형식보단 사상에 의해 가늠되어야 하지 않을까. 새로운 사상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새로운 형식에 담을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계몽‘이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질 때라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해조는 기존의 형식 속에 새로운 사상을 담아냈다. 마치 원래 먹던 그릇에 새로운 음식을 선보이듯, 구소설의 형식을 빌린 것이 외려 신소설의 미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썩 잘 읽히는 까닭이다. 결국 아직 ’안 굳어진‘ 생각을 담아내기에는 ’굳어진‘ 문장이 가장 좋은 그릇이었던 셈이다. 덕분에 요즘 소설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정형적 리듬감은 이 책의 문장들을 음악처럼 들리게 한다. 책장을 열면서, 자유종이란 제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했던 이유를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이 소설은 수평적이다. 서사적 줄거리의 기승전결보다는 몇몇 토론 주제만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단조로운 구성은 약점으로 지적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여느 소설의 플롯과는 다른 토론의 형식을 빌림으로써, 이 소설만의 독창적인 개성을 획득한다. 소설은 이매경의 생일에 있었던 개인들의 사회적 담론을 그리고 있다. 등장인물들은 모두가 여성인데, 남성 중심의 조선 사회에서 활동의 제약을 받아온 존재들이란 점에서 꽤나 시사적이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담이 주를 이루던 편파적인 사회에서, 이 여성들은 따로 만나 대화하고 시국에 대한 토론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카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성들의 무분별한 수다와는 사뭇 다른 정경이었다. 이 여성들의 담론은 현실 비판적인 토론(여성의 권리, 학문의 필요성, 자녀의 올바른 교육, 자주 독립에 대한 희망 등)에서 시작해, 이상적 사회 건설을 지향에 대한 꿈으로 귀결된다. 여성에게 발언권이 없던 시대에 여성들의 입을 빌린 풍자라니, 작가의 용기와 재치에 싱긋 웃음이 났다. 그래서일까. 담론이 있던 날을 한 여성의 생일로 설정한 점마저도 인상적이었다. 생일이 표상하는 근본적인 의미를 생각하면, 이들의 담론은 새로운 세상에서 다시 태어나고 싶은 욕구에의 반영으로도 읽혀졌기 때문이다.

또한 이 여성들은 모두 양반 계층으로, 개명한 이름(이매경, 신설헌, 강금운, 홍국란)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 사회자 격인 신설헌 부인의 이름이 인상 깊었는데, 그녀가 마치 새롭게 신설될 법(憲)이라도 표상하듯, 개혁에 대한 강한 의지를 피력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시대적 정황이 봉건사회에서 근대사회로 전환되던 시기였음을 고려하면, 남녀 차별 없이, 개명된(계몽된) 국민들의 오롯한 힘만으로 근대 국민국가가 세워지기를 바란 작가의 목소리가 스며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므로 이들(작가)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의견이 똑같을 수는 없다. 신설헌과 마찬가지로, 나머지 여성들도 거대 담론에 대해 저마다의 의견을 지닌 국민들을 표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경한 개혁의지를 보인 신설헌과 달리, 이매경은 개혁에 소극적이며, 홍국란은 점진적인 방법을 주장한다. 강금운은 전면적인 한글 사용을 주장하지만, 홍국란은 일시적인 한문 폐지에는 유보적인 반응을 보이인다. 이처럼 이들의 의견은 제각각 다르지만, 개혁이 필요하다는 사실에는 누구도 이견이 없다. 그 사실이 희망적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들의 의견 개진은 한계를 보여준다. 책의 말미에서 인물들은 모두 자신의 꿈을 이야기한다. 대한제국의 자주 독립과 문명개화, 평화와 안녕을 꿈꾸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앞에서 이들이 열띠게 토론한 현실의 문제와는 상당한 괴리가 있다. 말 그대로 꿈은 꿈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담론이 탁상공론에 그칠 듯한 느낌을 주는 것도 바로 꿈 때문이다. 그러나 꿈이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이유로 꿈을 꾸지 말도록 종용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꿈을 꾸어야 한다. 꿈은 그 자체로 자기완결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책 속의 여성들은 자신들이 처한 조악한 현실을 당장에 바꿀 만한 힘은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문제를 제기하고 생각을 나누고 현실 개혁에 대해 진지하게 머리를 맞대는 모습을 보였다. 나는 어쩌면 그 모습이야말로 진정 우리가 꾸어야 할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백 년 전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민주사회의 초상을 본 것이다.

자유종. 봉건 사회의 ‘백성’이 근대 사회의 ‘국민’으로 다시 태어나려면, ‘자유’가 있어야 한다는 이 책의 메시지를 생각한다. 이 책의 작가인 이해조는 애국계몽 운동가로 알려져 있다. 나는 문득 백 년 전에 붓을 든 한 작가를 상상해본다. 문학 속에 계몽의 메시지를 담아내려 했을 그 떨리는 희망의 붓끝을. 국권 회복을 위해서는 교육이, 계몽을 통해서는 자주권의 회복이, 그리고 봉건적인 것들의 타파가 필요하다는 것. 그런 현실적인 주장을 하나의 이야기란 꿈속에 담아내기 위해 그는 얼마나 고심하였을 것인가.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며 누리고 있는 것들이, 백 년 전에는 당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랍고도 숙연해진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일은, 백 년 전의 사람들과 그들의 시간에 대해 상상하게 되는 일이기도 했다. <자유종>이 올해로 출간된 지 꼭 일백 년이 된다는 말을 들었다. 자유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하여 크고 작게 울렸을 그 시대의 종소리들. 백 년 전, 우리보다 먼저 태어나 먼저 개혁을 느낀 이들 중에는, 이 책의 종소리를 읽고 자유를 깨친 이도 있었을 것이다. 그 종소리의 울림이 바꾼 사람들을, 바꾼 세상을 생각한다. 그리고 백 년 전에 울린 종소리의 수혜자가 지금의 나와 당신이라는 사실이 새삼 고맙다.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퇴보하고 있다는 각성의 목소리가 잦은 요즈음이다. 이 책을 진정한 자유를 상실하고 있는 이들에게 권하고 싶다. 비록 우리의 담론이 한낱 꿈에 불과할지라도, 우리는 계속해서 현실을 이야기해야 하고, 머리를 맞대야 하고, 꿈을 꾸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이 시대에 맞춤한 계몽일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자유의 종을 울리던 이해조의 마음이 되어본다. 백 년 전의 그 아련한 종소리가 우리의 자유를 토닥토닥 위로하는 듯하다. 나도 아름다운 울림을 물려주는 종소리가 되는 꿈을 꾸고 싶다. 비록 현실이 아프고 괴로울지라도, 아직은 이 말을 신뢰하는 까닭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내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

_ 이문재, <농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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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뜻밖이었다. 그래서 더 깊은 부끄러움을 느낀다. 잘 쓰지도, 공을 들이지도 못한 글임을, 스스로가 더 잘 아는 까닭이다. 책을 읽은 감상을 쓸 때면, 매번 비슷한 두려움을 느끼곤 한다. 남의 글을 무어라 평할 깜냥도 못될 뿐더러, 오독이나 안 했으면 다행이려니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식간에, 읽은 책에 대해 쓰고 있는 나를 본다. 사랑하는 탓일 게다. 내가, 책을… 돌아보면 늘, 고아 같았고 미아만 같았다. 아무도 펼쳐볼 사람이 없을 때, 오롯한 사람과 세상을 보여준 내 인생의 책들에 감사한다. 그들이 내 부모고 벗이고 스승이다.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받았음에도, 나는 여전히 부족한 문장이다. 그 사실이 부끄럽다. 더 노력하지 못했고, 더 바른 자세를 갖지 못했다. 언젠가 나도, 문학의 길을 갈 것이다. 그 외로운 길에, 이해조 선생의 따뜻한 격려도 있었음을 잊지 않겠다. 부족함에 어깨를 두드려주신 너그러움에 고개 숙인다. 이 부끄러움을 단정히 앉히고 다시, 순연히 익어가겠다.

이지안 / 대구광역시 수성구 범어1동
포천신문 기자 / ipcs21@hanmail.net입력 : 2010년 11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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