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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조문학 공모] 소설 일반 최우수作 - 웨딩 케익


포천신문 기자 / ipcs21@hanmail.net입력 : 2010년 11월 08일
↑↑ 신타인 (소설 일반부문 최우수작 수상자)
ⓒ (주)포천신문사
밤이 적막을 놓치지 않으려고 흰 줄기를 잡고 늘어지는 새벽 다섯 시 쯤 이었다. 허공을 꽉 채우고도 남아 내 고막에 들어차 윙윙거리던 소리들까지 지쳐 누워버린 시간이기에, 귀만 쫑긋거린다면 나무가 웃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 만큼 사방은 조용했다.

이미 고질병이 되어버린 불면을 두들겨서라도 뻗어버리게 만들려고 일부러 오래전의 쓸쓸했던 기억 까질 끌어안고 뒹굴 때였다. 내 방과 벽 하나를 두고 맞붙어 있는 509호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시간에 아이가 운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지만 예민해진 내 청각이 잡아낸 것은 그 울음이 어딘지 모르게 말라있다는 느낌이었다.

어느 울음이던 듣다보면 덩달아 눈물이 나올 만큼 살아있는 울음이 있는가 하면,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 건조한 울음소리가 있기 마련인데 희뿌옇게 찢어지는 새벽에 들려오는 아기의 울음소리에 눈물은커녕 섬뜩해지기까지 했다. 아이가 아픈가? 라는 걱정이 막 생기는 순간이었다.

더럭 무서움증이 솟았다. 벌떡 일어나 어떻게든 잠을 자보려고 껐던 불을 급히 켰다. 그 사이 아기의 울음소리는 멈추었다. 남은 흐느낌도 없었다. 새벽만 바짝 희푸스름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자 뭇 스산하기도 했다. 509호에 아무도 살지 않은지 벌써 몇 달째인데….

그녀가 우리 집의 초인종을 누른 것은 그들이 신혼여행을 다녀왔다는 이월 말경이었다. 여러 사람이 몇 날 며칠에 걸쳐 말짱한 집을 다 뜯어가며 개조를 하기 시작했다. 시어른이라도 모신다면 서른두 평으로는 조금 좁을 수도 있겠지...보이지 않는 이해를 갖으려 했을 뿐. 도대체 얼마나 멋 드러나게 꾸미는가? 기웃거리지 않으려 했는데 문을 활짝 열어놓고 공사를 하는 통에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벽과 바닥이 온통 파랬다. 바다...온통 짙푸른 바다가 내 옆에서 흐르고 있었다. 그 바다로 상아빛 소파가 놓여지던 날엔 탄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바다와 배. 어떻게 생긴 여자일까? 얼굴을 보기도 전에 궁금해지는데 그 호기심에는 내가 소유하지 못하는 자유로운 감성에 대한 질투가 묻어 있었다. 이사를 오기도 전부터 나를 자극한 여자가 푸른 접시에 케익을 담아왔다. 보통 이사를 오면 찰떡을 돌리는 것이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풍습이기도 하련만 생크림이 방금 핀 꽃처럼 싱싱한 케익을 들고 서 있는 그녀한테서 번외의 감정인 질투를 다시 느끼고 말았다.

그녀는 특이했다. 특별한 것이 아니라 특이하다고 느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고루 갖춰야 할 어떤 능력에서의 탈락을 자인하는 일이라 서글프기까지 했다. 이미 그 집 살림살이에 어느 정도 위축이 되어있던 나인지라 그녀를 집안으로까지 들어오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기가 싫었던 건 앞으로 그녀와는 정을 주며 오고가는 이웃이 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예감했던 탓이었다. 이것 역시 덜 채워진 심성에서 울 거 진 패배의식이었다.

우리는 서로 같은 방향을 보며 살고 있다는 것을 이르지 않은 아침과 아주 늦은 밤에 한번씩만 열리는 509호의 현관문 소리를 들으면서 알 수 있었다.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두 번이었지 사실은 아닐 수도 있다. 행동거지가 음전한 편이라면 이웃에게까지 현관문의 여닫음을 알릴 필요 없이 조용히 출입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신혼부부라는 것만 알았을 뿐 전혀 왕래 없이 몇 달이 흘러갔다. 여름 해가 길게 떨어지려는 저녁 무렵에 우연하게 그녀와 엘리베이터를 타게 되었다. 같은 오층에 살고 있다는 것을 서로 기억은 했는지 내가 오층을 누르자 그동안에 살이 찐 걸까? 할 만큼 봉긋해진 배를 손으로 가리고 있었다. 얼핏 본 것이었기에 일부러 알은 척까지 할 수 없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가벼운 목례를 던지고 돌아서 509호의 대문에 열쇠를 꽂고 있는 그녀의 목덜미가 유난히도 서늘해 보였다. 땀이 끈적이는 초여름 이였는데도 말이다. 그러고 보니 슬쩍 마주친 눈동자까지 바닷물처럼 새 푸스름 한 것도 같아 몇 달 전 그녀의 거실에서 훔쳐본 바다가 떠올랐다. 지금 그녀는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바다로 가는 것이라고. 그 바다로 가 어디론가 떠날 배를 탈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자 갑자기 그녀의 바다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그녀는 문 저쪽에서 바다를 닫고 있었다. 아무도 올 수 없도록 꼭꼭 잠그고 있었다.

여름햇살을 완전히 가로막은 블라인드를 열어 제 칠 생각은 아침부터 없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는데 만약 지금 저 블라인드를 열고 밖을 내다본다면 나는 빈 들판에 서 있다는 괴리에 빠져들 게 틀림없었고,

그 들녘으로 마침 노을이라도 떨어진다면 어쩜 죽고 싶기까지 할 허무에 또 휘말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나는 그녀의 바다만을 떠올리고 싶었다. 언젠가 라도 내 뼈를 흩뿌려야 할 곳, 살아서나 죽어서나 가장 서러운 고향이기도 할 바다를 옆으로 비껴선 채 그리워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상념은 스스로를 지치게 하기 보단 맞는 열쇠가 없어 열지 못하고 자물쇠만 뎅강 거리는 오래도록의 고립을 맛보게 했다.

그래도 끊어낼 수 없는 자존으로 버텨보던 어느 날, 늦은 가을 속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다. 얼굴이 많이 야위어 보였다. 푸른빛이 날 정도로 투명하던 눈동자에는 피곤함이 잔뜩 서려 있었고 금방 핀 목련화같이 희고 보들 하던 얼굴에는 까뭇한 점들이 듬성거릴 만큼 그녀는 엄마가 되는 훈련에 지쳐가고 있었다. 내내 부럽던 마음보다는 이럴 때 누구라도 옆에서 입맛을 돋우는 음식을 해주면 조금은 덜 힘들 텐데 라는 연민을 느꼈다. 그 얼굴이 내가 기억하는 혼자로서의 마지막 그녀 모습이었다.

가을이 다 가도록 방에만 틀어박혀 인정받지도 못할 소설이나 끄적이다 보니 계절은 어느새 눈 내리는 겨울 속으로 들어와 있었다. 참 조용한 이웃이었다. 적당하지 않은 무심한 거리였다. 다섯 발 짝 정도 떨어진 곳이었지만 그녀의 집에 새 식구가 들어왔다는 사실도 경비원의 입을 통해서 알아졌다.

영락없이 특히 눈이 엄마를 많이 닮은 여자아기가 그 집에 들어온 것이 벌써 보름도 넘었다는 것이다. 아기의 방이 안방이었던지 애기 울음소리를 한번도 들어보질 못했었다. 한 해가 저물기 이틀 전쯤이었나? 아기를 안고 외출을 하러 나오던 여자와 현관 앞에서 마주쳤다. 납부기일이 딱 되어서야 공과금을 내려고 은행으로 가던 길이었다.

아기를 안은 그녀는 단순히 '어머니'라는 이름만으로 그동안의 딱딱하던 벽을 허물며 전혀 예상치 못했던 부드러운 감정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그러해선지 망설임 없이 먼저
- 이렇게 추운 날에 아기를 데리고 외출을 하세요?
말을 건네면서 포대기안에 싸여있는 아기를 보려 들척이는데
- 예방주사를 맞으러 가야하는 날이라서요. 의사선생님이 지정해 준 날에 꼭 가야한다고 하더 라구요. 애기 미웁지요?
- 어머, 예뻐라. 어쩜 이렇게 뽀얗게 예쁠까요? 눈썹 좀 보세요. 갓난아기 눈썹이 어쩜 요렇게 예쁠 수가 있지?

말수가 진득하니 늘어난 것을 보아도 평소의 나 같지가 않다. 그런 내가 낯설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처음 웃는 웃음이 참 곱다는 것을 알만큼 깊은 눈으로 그녀를 마음에 담았다.
- 정말 예뻐요? 나는 아무리 봐도 미운 것 같더라구요. 나 미운 곳만 닮았나 봐요.
- 무슨 말씀을요. 이 눈 좀 보세요. 꼭 엄마 닮아서 바다 같아요. 아주 맑고 푸른 바다요
- 네? 바다요?

나는 거기에서 말을 막았다. 내가 왜 바다라고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나만의 바다를 그렇게라도 하나쯤은 갖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 애기하고 지내다보면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지요?
이제는 할 말이 더 이상은 없음을 알았기에 인사처럼 그 말을 남기고 아파트 광장에서 헤어지려고 하는데
- 네. 행복해요......-

내 귀로는 그 말이 절대로 행복한 사람의 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가을볕에 잘 삭은 된장을 퍼올 때 마침 장독대로 떨어지던 노을처럼 쓸쓸하다고나 할까? 그러한 느낌이었다.

그 후 나는 겨울을 안고 칩거에 들어갔다. 봄이 올 때 까지는 한참을 앓아야 할 얼음 밥의 고독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 주위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알려 고를 하지 않았다. 그런 비감한 겨울나기를 식구들마저 두둔해주는 편이라서 509호에서 이 겨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게 된 것은 새내기 봄이 묵은 겨울의 머리카락을 한주먹내기나 뽑아놓고 으스대 던 삼월 초순이었다.

딸아이가 경비실 앞에서 웅성거리는 사람들 틈을 헤집고 주워 들어온 이야기는 509호에 살던 여자와 제법 옹알이가 또렷해질 만한 아기가 지난 일월 말쯤에 죽었다는 것이었다. 그 집 남자는 증권회사에 다니고 있었는데 야근을 하는 날이 많았단다. 그날도 삼천포에 사는 시어머니의 생신을 맞아 밤늦게 고속도로를 달려가던 중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트럭과 충돌을 하여 운전을 하던 남자는 심한 뇌의 손상을 입었고 뒷자리에 타고 있던 아내와 아기는 안전벨트를 매지 않아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살던 이곳은 타향이라서 사고소식을 알릴만큼 친분이 있던 사람들도 없었고 앞집에 사는 나조차도 두 달이 다 되도록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나지 않아도 별다르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는 습관이 되어버린 나 이외의 무관심이 얼마나 죄스러운 것인가를 절실하게 느꼈다. 그 사고로 남자는 삼천포로 내려가서 치료를 받고 요양중이니 바다는 몇 달을 혼자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의 발자국이 오래도록 찍히지 않은 바닷가는 얼마나 쓸쓸했을까? 정작 떠난 사람보다 아무도 타지 않을 하얀 배와 흐름을 멈추었을 509호의 바다에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이렇게까지 매정한 나였던가? 나조차도 그런 내가 두려워지고 있었다. 아니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 같다.

어쩌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앞집의 대문을 바라보면 아기를 안고 나오던 여자가 보이기도 하고 온통 파랑색이던 바다가 스르르 떠밀려와 나를 삼키는 환영이 스치면 갑자기 몸에 전율이 일며 두려워져 엘리베이터를 기다리지 못하고 계단으로 뛰어 내려가는 날이 늘어났다.

사람은 무엇이든 잊을 줄 안다. 생각하는 일보다는 잊는 것에 더 열심이다. 잊어야 만이 살아낼 수 있다는 영악함을 누구보다 강하게 지니고 있던 나는 509호의 바다와 여자와 아기를 잊어가고 있었다.

아니 처음부터 그 여자는 바다색의 눈빛이 아니었고 그 집의 벽도 파란색이 아니었다고 상아빛 쇼파는 배가 아니라 棺이었을 것 같다는 잊어짐에 필요한 것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더 이상 바다를 궁금해 하거나 그리워하지 않았다. 그것은 얼굴도 모르는 여자에게 느꼈던 질투를 완전히 포기하는 일이었다. 비로소 내가 나로 보였다.

그 여자의 봉긋한 배를 흘깃거리던 여름이 가고 그토록 투명하던 눈동자가 지쳐 보이던 가을도 넘겼고 새근거리는 얼굴이 너무나도 예쁘던 아기를 보여주며
“밉지요? 정말 밉지요?”
투정 어리게 살포시 웃던 겨울마저 햇수를 넘겨 그 집에 아무도 살지 않은지 벌써 일년이나 지났는데 2월18일 새벽에 509호 작은 방에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던 것이었다.

고향에서 요양중이라던 남자가 그 사이에 재혼을 하여 아기를 낳았나? 그것도 아닌데. 뇌를 심하게 다쳤다던데 어떻게 결혼생활을 할 수 있었을까? 그것이 아니더라도 바다 같은 여자와 아빠라고 한번도 불러보지 못한 아기를 어쩌면 저리 쉽게 잊고 그녀의 바다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단 말이지? 이런저런 생각들이 이웃이라는 단순성을 떠나 같은 여자로서의 분노를 들먹인다.

분명히 애기는 울었다. 금새 달래주기를 바라는 통통한 울음이 아니라 아무도 바라봐주지 않아도 서럽지 않을 만큼의 메마른 울음소리를 분명히 벽 너머로 들었다. 이상한 것은 애기 울음소리는 들리는데 달래주는 어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잠이 몰린다. 눈이 빠져 나갈 만큼 피곤하다. 내가 일어났을 때는 아직은 차가운 겨울해가 창문으로 짱짱하게 붙어있을 때였다. 새벽에 들었던 울음소리는 그다지 기억나지 않는다. 혹시 도둑 고양이였을지 모른다고 편하게 생각했다. 머리 아프게 신경써봐야 509호에는 진통제를 건네줄 사람이 없지 않은가? 그쯤에서 울음소리에 대한 궁금증을 털어냈다. 그러고 나서 며칠 후, 점심 무렵이었다.

초인종이 울린다. 평소처럼 아무런 대꾸 없이 글을 쓰는데 초인종을 누르다 현관문을 두드리다, 같은 짓을 반복한다. 뭔가 급하다는 것을 알리려는 행동이었다.
- 여보세요. 여보세요. 앞집에 살던 승언이 할머니인데요. 잠깐만요. 잠깐만요
아, 그 아기가 승언이었구나. 무엇에라도 놀란 듯이 벌떡 일어나 대문을 열었다. 인사는 나눈 적 없지만 한번쯤은 얼핏이라도 보았을 노인이 내 앞에서 잔뜩 추워하면서 떨고 있었다.
- 할머니, 무슨 일이세요?

노인을 대문 앞에 세워 둔 채로 물었다. "이리 들어오세요. 몸을 녹여야겠어요." 하는 것이 도리였지만 나 역시 노인을 따라 급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 혹시 며칠 사이에 우리 아들을 보지 못했나요?

무슨 대답을 기다려야 하는지 자신도 알지 못할 만큼 절박한 목소리다.
- 할머니. 아드님을 보다니요? 제가 알기로는 몸이 안 좋아서 고향집에서 요양중이라던데. 그래서 건강해질 때까지 이집에서 떠나지를 못한다고 한다던데요. 왜 아드님이 어디 갔나요?
정말 많이도 궁금했다는 듯이 물었다.
- 그랬지요, 며느리하고 손주 놈이 그렇게 되고나서 이놈도 잘못되는 줄 알았는데 더 이상 나빠지지는 않더라구요. 늘 그 놈이 말했지요. 승언이 하고 유란이의 뒷정리를 하지 못했다고. 얼른 나아서 그것부터 해야겠다구요. 승언이 사진도 제대로 앨범에 꼽아놓지 못했다고요. 그러더니 며칠 전에 잠깐 바람 좀 쐬고 온다고 나가더니 소식이 없는 거예요. 갈 데도. 찾아갈 사람이 없는 줄을 내가 아는데요. 그래도 혹시나 하고 몇 군데 연락을 했더니 안 왔다고 하기에 혹시나 하고 여기로 와 본거에요. 정말 우리 아들을 보지 못했나요? 혹시 대문 여는 소리도 못 들었어요?

얼른 보리차를 한잔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입술이 하얗게 찢어지고 있었다.
- 할머니, 이리 들어오세요, 들어오세요.
노인은 보리차 한잔을 단숨에 마시고서야 꽉 누르고 있던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 이렇게 사람이 사는 것 같이 따듯한 색으로 도배를 하지 바다가 뭐가 그리 좋다고 온통 파랑 칠을 했을까, 그것이 다 멍인 줄 모르고, 이렇게 가슴 치면서 살아가야 할 멍이 될 줄도 모르고, 닦아도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어미 가슴에 멍이 될 줄도 모르고 왜 그렇게 파랑 칠을 처발랐을까? 연한 살색으로 도배가 되어있는 우리 집을 연신 둘러보면서 노인은 참으로 아픈 설움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래, 그것은 바다가 아니었다. 멍이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고 더 뚜렷해지는 멍이었다. 여러 가슴에 칠을 해 놓은 그 파랑 빛에 맞아 승언이와 유란이는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더 이상 바다가 그리울 까닭이 없는 순간이었다.

- 할머니, 며칠 전 새벽인데요. 제가 밤을 새우는 일이 잦은데 다섯 시가 조금 넘었을까? 갑자기 509호에서 애기울음소리가 나는 거예요. 참 이상하다 했지요"
- 네? 애기울음소리가요? 우리 아들집에서요?
- 네. 그런 것 같은데 잘못 들었다 생각했지요. 벌써 아무도 살지 않는지가 언제인데 그럴 일이 있나? 혼자 지워버렸어요.

- 전화를 해도 안 받고 대문은 잠겨있고 한번 들어가 보고 싶은데 어떡하면 좋지요?
애기울음소리가 들렸다는 나의 말에 할머니의 눈에 생채가 번쩍인다.
- 요즘은 관리실에서 보조열쇠를 갖고 있지 않아요. 그전 같으면 보조열쇠 하나는 관리실에서 맡았다가 비상시에 열곤 했는데 요즘에는 프라이버시를 너무 존중하다보니까 열쇠구멍도 서너 개씩은 되잖아요. 그러니까 대문을 밖에서 연다는 것은 불가능하구요. 그렇다고 창을 넘어 들어간다는 것도 어렵구요. 참 할머니. 열쇠 집에다 전화 한번 해 볼까요? 그 사람들은 대문 여는 데는 귀신이거든요. 그래도 안 되면 119에다 신고를 해서 그분들의 도움을 받도록 해보구요. 할머니가 꼭 509호에 들어가고 싶으시다면 그런 방법도 있다는 거예요.

전화를 건지 십분도 안 되어서 열쇠전문가가 왔다. 언젠가 들은 이야기로 금방 열어질 대문을 죽어도 안 열릴 것처럼 시간을 끌며 애를 태워서 돈을 더 우려낸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기에
- 일반주택과는 달리 아파트 현관문은 워낙 보호 캡이 두꺼워서 열리기가 만만치 않은데요-
- 아저씨, 지금 상황이 위급하니까 빨리 열어주세요. 그래야 해요.
어서요. 어서! -

만약 그러지 않으면 불벼락이라도 떨어질 줄 알라는 듯이 아주 단호하게 말을 했더니
- 어허, 다행히 열쇠가 하나만 잠겨있네요. 이런 것은 금방 열려요 -
그 사이에 찰카닥 파도소리가 들리고 바다가 보였다. 흐름을 멈춘 바다, 어디론가 떠나지 않았음이 분명한 배도 보였다. 노인과 나는 쉽게 발을 들여놓을 수 없어 하는데 열쇠장이가 먼저 거실로 들어섰다

- 우아, 바다에 온 것 같네. 벽지 한번 특이하게 했네요. 그런데 어째 으스스 하네요. 날이 더 추워지는 건가?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노인이 먼저 들어가더니 안방 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었다. 나는 현관에 그대로 서 있었다. 손에 묻기만 해도 금 새 번져 내 몸에, 가슴에 시퍼런 물이 든다는 게 겁이 났다. 내게도 심장가까이에서 스무 해가 넘도록 웅덩이진 상처가 있기 때문이었다. 감히 들여다볼 수 없을 정도로 깊게 패인 흔적, 그 둘레가 온통 멍 빛 이었다. 나도...

할머니가 욕실 문을 열었다. 아! 조용히 터지는 한숨이 차라리 안도에 가까웠다. 멀리서 보기에도 욕실 안은 물기가 전혀 없이 건조했다. 내 방과 벽 하나를 두고 있는 작은 방을 열던 할머니가 새파랗게 질려 뛰쳐나와선 거실바닥에 주저앉았다.
- 할머니, 왜 그러세요. 할머니

내가 더 맘이 급해져 이럴 줄 알았으면 열쇠장이를 보내지 말았어야 한다는 후회가 들었다. 할머니가 손가락으로 귀를 찔러가며 뭔가를 말하는데, 도무지 알아차릴 수 없어 작은 방을 들여다보던 나한테선 묘한 흥분이 일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는데도, 숨소리가 거칠지 않고 일정했다. 안으면 품 안에 쏙 들어올 만큼의 인형이 젖병을 물고 누워 있고 그 옆에는 한 쌍의 결혼식 사진이 눈을 꽉 채울 만큼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위에는 회오리무늬의 파란 양초가 두 개 꽂힌 데코레이션 케익이 촛농을 이 세상에 남기는 마지막 눈물처럼 잔뜩 떨궈둔 채 말라가고 있었다. 순간 빵을 한 뭉텅이 떼어 비벼보고 싶어졌다. 처음부터 인연이란 이처럼 까끌 하게 부스러질 모래였을 거라는...

애절한 광경은 뜻밖의 감상을 들추고, 그런 내가 어처구니없어져 한숨이 깊어질 때였다. 눈자위가 어떤 파편에 맞기라도 한 것처럼 아찔해졌다. 살다보면 저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도 있구나... 감동이 격해 올라 이를 앙다물었다. 젖병을 문 애기와 자신의 여자가 되기 위해 걸어오는 한 여인의 미소를 가슴위에 올려둔 채로 반듯하게 누워있는, 남자의 뺨으로 눈물자국이 짙게 나 있었던 것이었다.

깨끗했다. 흐트러진 곳이 하나도 없었다. 경비원이 달려오고 경찰서에도 형사들이 이것저것을 집어내는 동안 나는 인형의 젖병을 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것을 빼내면 분명히 내가 들었던 울음소리가 들려 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새벽에 애기울음 소리가 들리더라는 나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형사가 인형의 젖병을 빼자마자 "으앙. 으앙. 으앙. 으앙" 울음을 터뜨렸다. 승언이도 저렇게 울었으리라...할머니가 젖병을 잘잘 흔들더니 승언이를 안아 천천히, 천천히 물려주었다. 다시 젖병을 문 인형도 승언이 아버지, 어머니 옆에 눕더니 반짝이 속눈썹을 내렸다.

"딱 이년 되었네요. 우리 아들이 승언이 어미와 결혼을 한 날이. 첫 번째로 맞는 결혼기념일은 지 놈도 아파서 그냥 넘어 갔을 테지만, 이번만큼은 그냥 보낼 수 없어 여기로 와서 혼자 촛불을 켜놓고 축하를 했나 보네요. 그러고 나서 그 애들을 찾아 저도 그 곳으로 갔나 보네요. 아마 2월 18일은 온 가족이 그 곳에서 재회를 하는 더 기쁜 날이 되었을 거예요. 등신 같은 놈, 저는 제 식구를 만나서 행복하겠지만 나는 지 놈 잃은 이 멍을 어찌 풀고 살라고, 어찌 닦고 살라는지"

뭉툭한 손톱으로 벽을 마구 쥐어뜯는데 온 몸이 바다색으로 물이 들고, 파도에 덮쳐 울음 짓이 크던 바다가 멀리로, 멀리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신타인 / 서울 서대분구 홍제3동 247-19 홍일아파트 609호
포천신문 기자 / ipcs21@hanmail.net입력 : 2010년 11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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