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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르포=이상창] 접경지역 포천 사람들 국경지대를 가다

민주평통 포천시협의회 자문위원 4박5일 중국연수 체험기
백두산 천지, 두만강 국경지대, 윤동주 생가, 항일유적지 등

이상창 기자 / 입력 : 2010년 10월 03일
ⓒ (주)포천신문사

9월 26일 아침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은 일행은 기자를 포함해 13명이다. 접경지역에 사는 민주평통 포천시협의회 자문위원과 통일무지개 회원들이 백두산과 두만강, 연변의 항일유적지 일대 등 국경지대를 견학하기 위해 4박5일 코스로 중국연수를 떠났다.

인천공항에서 두 시간 비행 끝에 도착한 연길은 중국 길림성 동남부 연변지역 조선족자치주의 중심도시로 인구 52만명이 거주하며 조선족은 56%가 살고 있다. 연변조선자치주장도 조선족이요, 연길시장도 조선족이다. 그래서일까? 공항에서 도심지로 향하는 버스 차창밖에 늘어선 건물에 달린 간판들은 한결같이 한글을 먼저 쓰고 한자를 나중에 써놓았다.

‘원할머니 보쌈집’. ‘설운도 노래방’ ‘강원도 삼겹살’…. 친근하고 반가운 간판들도 지나갔다. 자신을 조선족 3세라고 소개한 30대 중반의 가이드 김혜련씨는 “서울에 있는 것은 연길에도 다 있다”며 “중국에서는 연길을 ‘중국의 서울’이라고 부른다”고 전했다. 집집마다 위성을 달아 조선족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한국의 공중파 방송을 실시간으로 보고 있다고 한다. 연변 거리에서 만난 조선족들은 한국의 거리에서 만난 이웃들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모자를 쓰는 아이의 형상을 닮은 모아산(帽兒山)에 오르는 길, 가이드는 최근 조선족자치주의 지위가 흔들리고 있다고 일행에게 설명했다. 연변주의 조선족 인구가 전체 인구의 36%로 급감하면서 연변이 조선족자치주의 지위를 잃게 될 것이라는 우려가 팽배했다. 한중 수교 이후 조선족이 한국으로 대거 빠져나간 데다 이농현상까지 겹친 탓이다. 그래서 자치주에서는 이제 한국과 마찬가지로 아이 셋 이상을 낳는 출산장려정책을 펴고 있다고 한다.

ⓒ (주)포천신문사

연변자치주와 연길, 그리고 조선족의 현주소를 찾고 난 일행은 연길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북한과 중국의 접경도시인 도문으로 향했다. 국경지대에 이르자 두만강이 보이고 북녘땅도 보였다. 강을 사이로 왼편의 중국의 산들은 곧게 뻗은 나무와 울창한 숲이었지만, 강건너 오른편 북한의 산들은 작은 나무가 듬성듬성한 민둥산이었으며 한알의 곡식을 건지려 개간한 밭들이 산꼭대기까지 자리하고 있었다.

차에서 내리면서 가이드는 1970년대만 해도 연변 사람들은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북한쪽으로 월경했지만 지금은 북한 주민들이 연변 친척의 초청을 받아 곡식과 물품을 받아가고 있다고 전했다.

국경지대 두만강 하류 나루터에서 배에 올라탔다. 뱃사공이 거센 물살을 가르며 북측에 5m도 안되는 거리까지 배를 대자 국경수비 초소의 북한 병사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뱃사공은 우리에게 ‘북한병사를 향해 카메라 셔터를 눌러서는 안된다’고 거듭 당부하기도 했다. 긴장감이 흘렀다.

“안녕하세요”라며 손을 흔들고 인사를 건네자 건너편 총을 매고 보초를 서는 북한병사는 고개만 약간 끄덕일 뿐 표정은 없었다. 뱃머리를 다시 돌리면서 뱃사공은 노랫가락을 틀었고, 일행중 연장자인 김종현 새터민단장과 이준호 수석부회장이 선창을 하자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함께 따라 불렀다. 남한 사람이든 북한 사람이든 중국 연변의 동포들이든 지난 80여 년 동안 수도 없이 불러온 우리 민족의 애창곡이었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젓는 뱃사공 /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 떠나간 그배는 어디로 갔소 /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 언제나 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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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터에 내리자 광장에서는 조선족 중노년 여성들이 덩실덩실 흥겹게 춤을 추고 있었다. “경기도 포천에서 왔습니다”라고 오병익 회장이 인사를 건네자, 이들은 우리에게 함께 춤을 추자는 손짓을 했다. 오병익 회장과 전순이 여성분과 위원장, 윤미숙 자문위원, 장혜정 행정실장이 맨 먼저 다가가 동포들의 손을 붙잡았고, 일순간 모두가 뒤섞여 함께 어깨춤을 추었다. 다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헤어지며 뒤를 돌아보자 동포들은 우리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연신 손을 흔들며 아쉬워 했다.

북한과 중국을 잇는 다리는 모두 7개지만 지금은 5개를 사용하고 있다. 북한 함경북도 남양시와 중국 연변자치주 도문시를 잇는 다리의 중앙에는 빨간 경계선이 그어져 있다. 누군가 한 발짝 만 선을 넘는 시늉을 하자 중국 공안의 호통이 즉각 튀어나와 모두가 놀라기도 했다.

5분쯤 지났을까. 북한쪽에서 함경북도 차량번호판을 단 주황색 대형 트럭이 선을 넘어오고 있었다. 검문소에 이르자 차에서 내린 50대 중반의 운전자가 중국공안과 얘기를 주고 받았지만 말이 통하지 않은 것을 눈치 챈 가이드가 통역자로 나섰다. 중국과 무역을 위해 왔는데 중국업체 담당자가 도착하지 않아 안으로 들여보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두만강변을 걸으며 건너편을 바라보자 멀리 중국을 잇는 철로를 따라 북한여성 4명이 산 중턱의 밭을 향해 걷고 있었다. 소리쳐 인사를 건네며 손을 흔들자 모두가 우리쪽을 쳐다보며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다음날 백두산 천지견학을 위해 이도백하 숙소로 향하는 길, 두만강 다리 검문소에서 중국 공안에 붙잡혀 있는 북한 트럭운전자의 근심 어린 표정이 자꾸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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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8일. 오늘은 이번 중국연수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백두산 천지를 오르는 날이다. 숙소의 커텐을 걷자 하늘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고 눈발이 매섭게 흩날리고 있었다. 9월말에 중국에서 본 첫눈이었지만 반가운 것도 잠시였다. 천지를 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백두산 입구로 가는 30분 동안 눈이 내리다 비가 오고 해가 뜨기도 했다. 가이드가 마이크를 잡았다.

“왜 백두산이라고 하는지 아세요? 하루에도 날씨가 백두번 바뀐다고 해서 백두산이랍니다. 천지를 보러오는 사람은 천지인데 천지를 못보고 가는 사람이 천지라고 합니다.”

백두산 입구에 다다르자 영하 날씨의 매서운 한파가 옷깃을 파고 들었으며 눈발은 더욱 거세게 흩날렸다. 굵은 한자로 長白山(장백산, 중국식 발음 ‘창바이산’)이라고 쓰여진 현판이 먼저 눈에 들어오고, 매표소 앞에는 중국 관광객과 한국 관광객들이 넘쳐났다. 중국이 전에는 거들떠보지 않던 이곳 장백산을 2008년부터 10대 명산의 하나로 지정한 후 대대적인 홍보를 하고 관할도 길림성에서 중앙정부로 바꾸면서 관광효과가 나타나고 있다고 가이드가 설명했다.

‘평화통일염원 기원제-백두에서 한내천까지.’ 민주평통 자문위원들이 한내천에서 채수한 생수통과 함께 준비한 현수막에 적힌 문구다. 가이드가 매표소에 간 사이 일행이 기념사진을 찍으려 현수막을 펼치려 하자 중국 공안들이 재빨리 달려와서 제지했다. 한국 관광객의 한 팀이 ‘백두산은 우리 땅이다’라고 쓴 현수막을 들고 사진을 찍은 이후, 한국인들이 현수막을 들고 사진 찍는 것은 철저히 통제되고 있단다. 백두산은 이처럼 미묘한 외교 갈등이 서린 곳이기도 했다.

ⓒ (주)포천신문사

폭설이 내려 출입을 오전 9시까지 통제한 장백산 관리소측은 뒤늦게 ‘천지는 올라갈 수 없고, 장백폭포(비룡폭포)까지만 올라갈 수 있다’고 전했다. 천지를 보러왔는데 올라갈 수 없다니! 일행들은 일제히 아쉬움의 탄식을 했지만 백두산 설경도 감상하며 장백폭포까지라도 올라가자고 의견을 모았다.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눈발이 강해지고 짙은 안개가 자욱해 왼쪽의 천문봉(2,670m)과 오른쪽의 용문봉(2,595m)의 형상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10cm가 넘는 눈길과 가파른 나무계단을 30여분 동안 오르자 누군가 ‘이곳이 장백폭포!’라고 말했지만 야속하게도 장백폭포도 안개에 휩싸여 보이지 않았다.

장백폭포에서 내려오면서 ‘작은 천지’로 불리는 소천지(小天池)를 찾아 천지에 오르지 못한 아쉬움을 달랬다. 이곳은 신기하게도 들어오는 물줄기만 있고 나가는 물줄기가 없는데 이는 바위 밑에 깔린 용이 물을 마시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소천지 맞은편에는 백두산의 비경으로 꼽히는 깊은 녹색 연못이라는 의미의 녹연담(綠淵潭)이 있다. 녹연담의 단아한 물빛과 시원하게 내리는 2개의 폭포는 또 장백폭포를 눈에 담지 못한 아쉬움을 채워주었다.

이어 찾아간 곳은 지각변동으로 땅의 일부분이 꺼지면서 가라앉은 지하삼림이다. 산책로를 20여분 따라 내려가자 지하 100m 협곡에 뿌리를 내린 생명들이 숲을 이루고 있어 신비감이 더했다. 하지만 일행은 천지를 보지 못한 미련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한 채 숙소로 돌아와야 만 했다.

9월 29일 아침 이도백하 숙소에서 바라본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구름 한 점 없고 눈이 부실 정도로 청명한 가을 하늘이었다. 멀리 백두산 봉우리들도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오병익 회장은 가이드에게 ‘오늘은 천지에 오를 수 있느냐?’고 물었고, 천지 관리소측과 통화한 가이드는 ‘천지에 올라가는 길에 눈이 많이 쌓여 제설작업을 하고 있는데 확신은 못하지만 오후에는 길이 열릴 수도 있다’고 전했다. 천지를 볼 수도 있다는 말에 일행의 눈빛이 빛나기 시작했다. 30분 동안 회의를 가진 후 결론은 천지를 다시 찾는 것으로 정해졌다.

ⓒ (주)포천신문사

천지에 오르는 도로제설 작업이 끝나려면 시간이 많이 남아 우선 어제 보지 못했던 장백폭포를 다시 오르기로 했다. 어제 가려졌던 천문봉과 용문봉은 아름다운 설경으로 자태를 드러냈다. 천지물이 흐르는 장백폭포의 하얀 물줄기도 눈앞에 펼쳐졌다. 포천 한내천에 채수한 생수통의 물을 천지물에 쏟아붓는 합수제 행사를 가졌다. 그리고 포천 한내천에 합수할 천지물을 다시 채수해 생수통에 담았다. 우리 모두 평화통일을 염원하면서.

포천 한내천에서 백두산 장백폭포까지 생수통을 번갈아 들었던 손성국 청년분과위원장과 임종훈 간사는 내리막길에서도 채수한 생수통을 운반하는 담당이었지만 늘 표정은 밝았다. 최성진 자문위원은 이들의 고통(?)을 분담해주겠다며 생수통을 받아 들었다.

점심을 먹고 10분쯤 지났을까? 가이드가 황급히 달려오더니 “빨리 짚차를 타라”고 했다. 천지로 오르는 길이 활짝 열린 것이다. 일행은 6인승 짚차 두 대에 올라타고 천문봉의 꼬불꼬불한 산중턱으로 향했다. 25분쯤 지나자 짚차가 정상 바로 아래에 멈춰서고 다시 10분 남짓 걸어서 정상을 올라갔다. 1m가 넘게 쌓인 눈이 세찬 강풍에 흩날리며 얼굴을 제대로 들 수 없었지만 천지를 오르는 데는 아무런 방해가 되지 못했다. 최봉회 자문위원은 아내 이양성 통일무지개회원의 손을 단 한 번도 놓지 못했다.

ⓒ (주)포천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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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천지가 활짝 열렸다. 여기저기 감탄사가 터졌고, 갑자기 백두산의 힘찬 맥박이 엄습해오는 것 같았다. 가장 높은 장군봉(2,750m)과 백운봉 등 열여섯 개의 봉우리가 한 폭의 화려한 그림으로 서 있었다. 눈부신 햇살을 받은 천지 물빛은 더욱 맑고 깊고 푸르게 빛났다. 백두산 날씨의 변덕 탓일까? 정상에 오른 수천 명의 관광객들은 뭔가에 쫓기듯 맑게 갠 천지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느라 분주하게 셔터를 눌러댔다. ‘백두산을 열 번 찾은 끝에 천지를 처음 보았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멀리 장군봉에서 천지 물가로 눈길을 따라가 보니 북한 초소들도 육안으로 들어왔다.

백두산 관광객의 90% 정도는 이곳 북파코스를 찾고 있으며, 관광객의 80%는 중국인, 나머지는 한국인이 많고 드물게 유럽인들도 있다. 최근에는 4~5년 후 천지가 화산폭발할 가능성이 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두려움 보다는 호기심으로 백두산을 찾는 관광객이 늘고 있다고.

그토록 보고 싶었던 우리민족의 성산 백두산 정상에 올라 천지를 보물처럼 가슴에 가득 담고 하산하면서도 마음 속 한 구석에는 응어리 같은 것이 남아 있었다. 천지를 정복한 배부른 자(?)의 뒤늦은 투정으로 들릴 지 모르겠지만 하산하면서 내내 이런 생각을 했다.
‘왜 중국땅을 밟아 장백산이라는 현판 아래를 통과해 이곳에 와야만 할까?’
그리고 염원했다. 북쪽으로 올라 백두산 천지 둘레를 한 바퀴 돌 수 있는 날이 어서 오기를.

9월 30일은 중국 연수 마지막 날이다. 천지 등정에 재도전하느라 일정을 미뤘던 용정시로 향했다. 연변은 한민족의 새로운 터전이자 항일운동의 얼이 서려있는 우리 역사의 현장이다. 특히 용정은 우리 민족이 이주해 처음으로 정착한 곳으로 항일운동의 요람이 되었던 대성중학교가 있다. 이곳은 민족시인 윤동주 등 많은 민족투사를 배출한 곳이며, 통일운동가 문익환도 대성중학교를 나왔다.

들어서면서 맨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윤동주 시인의 시비이고, 거기에는 그의 대표작이랄 수 있는 서시(序詩) 전문이 실려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 했다. /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 가야겠다. /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주)포천신문사

용정제일중학교로 교명이 바뀌었지만 옛 건물은 1900년대 초기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용정을 포함한 만주벌일대 한민족 역사를 생생하게 소개하는 박물관으로 우리들을 맞았다. 일행은 방명록에 이름을 남기고 다시 10여km 떨어진 윤동주의 생가가 있는 명동촌을 찾았다. 이곳은 민족운동가 문익환 목사, 민족투사 송몽규 선생이 태어난 마을이기도 하다. 우리는 잠시 윤동주 생가 마루에 앉아 29세의 젊은 나이에 일본 형무소에서 순국한 시인의 어린 시절과 청년시절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간도 15만원 탈취 사건' 현장도 찾았다. 무장 독립조직인 북로군정서 소속 철혈광복단 단원들은 독립군 자금을 마련키 위해 1920년 1월 4일 간도 명동촌 입구에서 일제가 회령에서 용정출장소로 호송하던 거금을 탈취한 사건으로 현장에는 기념비가 있고 주변에는 ‘거사’를 일으켰던 주역들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었다.

항일독립운동 당시 한민족의 기상을 상징하는 비암산의 일송정(一松亭)과 용정 근처를 돌아 두만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지류인 해란강을 지날 때는 버스 안에서 조선족 3세 가이드와 일행이 ‘선구자’를 일제히 합창했다.
‘백두산’ ‘한민족’ ‘항일운동’ ‘남북분단’ ‘통일’….
연길공항에서 비행기에 올라타면서 우리는 이런 화두를 짐으로 꾸린 채 인천행 귀국길에 올랐다.

이상창 기자 / lscnews@hanmail.net
이상창 기자 / 입력 : 2010년 10월 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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