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할리우드는 댄스 뮤지컬이 호황을 이루었지만 역시 이전 시대와 마찬가지로 브로드웨이 히트 뮤지컬을 영화화한 작품들이 대세를 이루었다. 하지만 모두가 작품의 완성도면에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반면에 오리지널 할리우드 뮤지컬로 만들어진 작품이 단 두 편 개봉되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줄리 앤드류스(Julie Andrews)가 주연한 뮤지컬 <빅터 빅토리아(Victor Victoria, 1982)>는 여자주연상을 포함해서 세 개의 골든글로브상을 수상하면서 1980년대 할리우드 뮤지컬의 체면을 살려주었다.
자신의 성적인 정체성을 숨긴 채 남자 혹은 여자로 살아가야하는 상황은 어느 장르에서건 흥미를 끄는 내용이다. 연극에 있어서 남자가 여자 역을 하는 경우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근대에 이르기 까지 오랜 전통으로 이어져왔다. 옛날에는 여자가 무대 위에 오를 수 없었을 뿐더러 사회생활을 하는 것조차 어려웠기 때문이다.
불과 400년 전인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 시대만해도 여자가 무대 위에 오르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는데 이런 상황을 재미있게 엮은 작품이 영화 <셰익스피어 인 러브(Shakespeare in Love, 1998)다. 여자는 연극무대에 올라갈 수 없다는 법규 때문에 벌어지는 사랑과 아픔을 다루고 있다. 촉망받는 작가인 셰익스피어는 단 한 줄의 글도 쓰지 못할 정도로 슬럼프에 빠진다. 그러던 중 그는 연극 오디션에 재능을 보인 한 소년에게 순식간에 매료된다. 그런데 사실 그 소년은 연기에 대한 열정을 숨길 수가 없어서 남장을 한 여자였던 것이다.
동양에서는 여성에 대한 편견이 더욱 심했다. 중국의 전통극인 경극이나 일본의 가부끼도 무대 위에서 남자가 여자 역을 했다. 물론 우리의 탈놀이도 예외는 아니다. <패왕별희>는 중국의 경극 배우들의 삶을 조명하면서 특히 여자 역을 담당하는 남자배우의 애환을 그린 작품이다. 물론 오늘날에도 여자 역을 남자가 하고는 있지만 그건 하나의 전통으로 이어져갈 뿐이며 금지되어 있지는 않다. 에서 보듯이 자신을 여자로 속여 남자와의 관계를 지속하는 경우도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작품에서 여형배우인 자신의 부인이 남자인지도 모르고 오랫동안 부부관계를 유지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지만 남자인 여형배우가 여자 역을 더 여자답게 연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여형배우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없던 시대가 만들어낸 산물이다.
연극에 있어서 남자가 여자 역할을 하는 경우는 여장남자의 연기를 볼 수 있는 독특한 재미가 있다. 한편으론 남자가 여자인척하면서 해프닝을 벌이는 상황들도 흥미롭다. 절대절명의 상황 하에서 남자가 여자 행세를 하면서 웃음을 유발하는 코미디는 더욱 폭소를 유발하기 마련인데 특히 1959년에 개봉된 빌리 와일더(Billy Wilder) 감독의 <뜨거운 것이 좋아(Some Like it Hot)>는 시대를 뛰어넘는 명작 코미디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토니 커티스(Tony Curtis), 잭 레몬 (Jack Lemmon) 그리고 감미로운 노래와 성숙한 연기를 선보였던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 등이 좌충우돌하면서 로맨틱 코미디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두 재즈 뮤지션이 우연히 살인사건을 목격하고 여자 악단에 끼어들어 여장을 한 채 시카고에서 플로리다로 도피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인 <뜨거운 것이 좋아>는 여장 남자들의 익살과 갱단의 잔인성을 잘 대비시킴으로써 희극성을 극대화시킨 영화이다. 이 영화에 배어있는 여장남자들의 유머감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이며 2000년 미국영화연구소(AFL)에서 선정한 ‘최고의 코미디 100편’ 중에서도 단연 1위를 차지할 정도로 할리우드 고전 코미디 시대의 마지막 명작으로 자리매김했다.
반면에 여자가 남자인척하고 게다가 여자 역을 연기해야하는 상황도 매우 재미있는 설정이다. 그것도 생계나 사랑을 위해서라면 매우 독특한 상황이 많이 연출될 수 있다. 여자와 남자를 넘나들며 해프닝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관객들에게 상당한 즐거움을 선사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빅터 빅토리아>는 상황설정에 있어서 <뜨거운 것이 좋아>하고는 정반대의 플롯을 지니고 있다.
생계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남자가 되어야 했고 무대 위에서 여자 역을 연기해야 하는 빅토리아- 좌충우돌하면서도 재미있는 상황을 만들어내는 색다른 로맨틱 코미디로 탄생되었다. 물론 과거에도 여자가 남자 행세를 하는 내용의 작품들이 많이 있었다. 특히 셰익스피어의 <십이야>는 이런 종류의 코미디로서는 효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남장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집으로 들어가 복잡한 상황을 만들어내는 남장여자의 사랑 찾기 놀이는 관객에게 끊임없는 재미를 선사해 준다.
하지만 <빅터 빅토리아>는 단순히 로맨틱 코미디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시니컬한 요소를 지니고 있다. 생계를 위해 남장을 선택한 빅토리아는 가수로 성공하고자 파리에 도착한다. 하지만 나이트클럽에서 노래하기엔 지나치게 고상한 창법 때문에 오디션마다 퇴짜를 맞는다. 아파트 월세도 못 내고 밥 먹을 돈도 없어 현기증에 쓰러지기까지 하면서 최악의 순간을 맞이한다. 그러던 중 우연히 빅토리아의 노래를 들은 게이 가수 토티는 그녀의 재능을 발견하고 파리에서 가수로 데뷔할 기회를 만들어 준다. 토티는 빅토리아에게 평소에는 짧은 머리에 남성정장을 입고 빅터 행세를 하게 한다.
그리고 무대에 설 때는 여장을 한 채 여자가수로 활동하게 하는 기묘한 이중생활을 시작하게 만든다. 토티의 도움을 받아 충실하게 남자의 역할을 수행한 빅토리아는 결국 유럽전역을 휩쓰는 톱스타로 인기를 얻게 된다. 그러나 빅토리아의 남자행세는 위기를 맞이한다. 신사처럼 점잖고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흥행사 킹에게 마음을 빼앗기면서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여자 역을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빅터에게 역시 마음을 빼앗긴 킹은 성적 정체성의 혼란을 경험하면서 사랑에 괴로워한다. 결국 사랑의 감정을 숨길 수 없어 빅토리아의 욕실에 숨어든 킹은 빅터가 여자인 빅토리아인 것을 알아내게 되고 빅토리아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결국 그녀는 무대에서 스스로의 정체를 드러내며 빅토리아로 다시 되돌아간다.
<빅터 빅토리아>는 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의 주역 줄리 앤드류스가 주연하고 남편인 브레이크 에드워즈(Blake Edwards)가 감독한 영화로 개봉 전부터 화제에 오르며 기대를 모았다. 화려한 나이트클럽의 밤무대에서 공연하는 남장 여가수의 애환을 그린 독특한 소재의 영화로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남자 주인공을 ‘게이’로 설정하는가 하면 동성애적 코드를 삽입하는 등 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를 뮤지컬이란 장르에 과감하게 접목시켰던 점도 많은 사람들의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상당히 모험적인 작업이었지만 결과는 시니컬하고 전혀 색다른 느낌의 화제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빅터 빅토리아>가 관객에게 주는 웃음은 셰익스피어의 <십이야>하고는 다른 웃음이다. 그것은 <뜨거운 것이 좋아>의 여장을 한 두 남자와 마찬가지로 두 가지 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음으로 해서 발생하는 해프닝으로부터 발생한다. 거기에다가 빅터라는 남성상을 연기하면서 빅토리아라는 여성이 자아내는 정체성의 혼돈과 묘한 동성애적 상황 등이 재미를 주면서 동시에 관습적인 성 체계의 허구를 드러내주고 있는 독특한 희극이다.
<빅터 빅토리아>는 시니컬한 내용과 동성애적인 이미지가 곳곳에 묻어있어서인지 국내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미국과 유럽에서는 무대뮤지컬로 각색될 정도로 흥미 있는 소재이기도 하며 영화는 2000년 미국영화연구소(AFL)에서 선정한 ‘최고의 코미디 100편’ 중에서 76위에 선정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