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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선비정신=136]

오세 신동, 끝없는 방랑자 김시습
리효종 기자 / 입력 : 2009년 04월 30일
↑↑ 리효종
한국한시협회 포천지회장
ⓒ (주)포천신문사
김시습(金時習) : 1435년(세종 17) ~ 1493년(성종 24).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글자를 읽고 3세때 글을 지었으며, 5세에 중용, 대학을 배워서 신동이라는 소문이 났다.

집현전 학사 최치운이 보고 정말 기특한 재주라 칭찬하고 이름을 시습(時習)이라 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세종은 김시습을 승정원으로 부르고 지신사(知申事) 박이창(朴以昌)으로 하여금 시험을 보게 하였다. 박이창이 먼저
“동자의 학문은 흰 학이 푸른 창공을 춤추는도다(童子之學 白鶴舞靑空之末).”

김시습이 댓구를 맞추었다.

“성주의 덕은 누런 용이 푸른 공중에서 꿈틀거립니다(聖主之德 黃龍飜碧空之中).”

박이창이 김시습을 무릅위에 앉히고 여러번 시험하였는데 그때마다 좋은 시를 척척 지어내었다.

세종은 직접 김시습을 보고 싶어하였으나 소문이 나는 것을 꺼려하여 소문없이 잘 길러서 학업이 성취된 뒤에 크게 쓸 예정이었다.

세종이 김시습에게 비단 50필을 주면서 네 힘껏 가져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김시습이 그 끝자락을 잡아매 그 한 끝을 손에 잡고 끌고 나갔다. 이때부터 김시습의 이름은 천하에 진동하여 이름대신 오세 신동으로 소문이 났다.

13세에 김반(金)에게 논어, 맹자, 시경, 서경을 배우고 윤상(尹祥)에게서 주역, 예기, 사기를 배웠다.

세종과 문종이 잇달아 승하하고 어린 단종이 등극한지 얼마 안되어 세조에게 양위하였다.

이때 시습의 나이 21세였다. 그는 삼각산에서 글공부를 하다가 단종의 양위 소식을 듣고 대성통곡하고 읽던 책을 불태운 뒤에 도망쳐나와 절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불명(佛名)을 설잠(雪岑), 청한자(淸寒子), 동봉(東峯)이라 하였다.

그는 작은 키에 호기가 넘치고 예의 따위는 전혀 차리지 않았다. 성격이 꼿꼿하여 남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았다.

시대의 잘못을 한탄하고 드디어 전국을 방랑하니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산천이 없었다. 그에게 배우기를 원하는 자가 있으면 윤리강상이 무너진 세상에서 배워서는 무엇하냐고 하며 거절하였다. 산에 오르면 나뭇잎에 시를 쓰고 혼자 읊조리다가 울면서 그 나뭇잎을 따버리고 비오는 밤이면 흰 종이 100여장을 꺼내어 물가에 앉아 혼자 읊조리면서 시를 쓰고 쓴 다음에는 그 종이를 물에 던지곤 하였다. 때로는 나무를 깎아 사람의 모습을 만들어 책상위에 올려놓고 온종일 지켜보며 목놓아 울다가 태워버리곤 하였다.

벼슬한 고관을 만나면 반드시 그 앞에서 “이 백성이 무슨 죄냐?” 하며 통곡하였다.

달 밝은 밤이면 청초한 목소리로 이소경(離騷經)을 읽는데 그 때마다 눈물이 흘러 옷깃을 적시곤 하였다.

술을 좋아하여 자주 취했으며 취한 뒤에는“우리 영능(英陵 : 세종대왕 능)을 다시는 못 뵙는구나.” 라고 한탄하며 슬피 울었다. 이때는 김수온(金守溫), 서거정(徐居正)이 국사(國士)로 온나라에서 높이는 우수한 선비로 일컬어지던 시기였다.

하루는 서거정이 조정에 가는 길에 김시습을 만났다. 김시습은 끈으로 허리를 질끈 동여 맨 남루한 옷차림이었다.

“강증(서거정의 자)은 평안하신가?”

시습이 큰 소리로 무례하게 대하였지만 서거정은 웃으면서 대해 주었다고 한다.언젠가 서거정이 강태공이 낚시질하는 그림을 주고 시를 부탁하니 김시습은 이렇게 썼다.

비바람 쓸쓸히 낚시터에 불어올때
위천의 물고기랑 욕심이라곤 모르더니
어찌하여 늙으막에 옹양장이 되어
공연히 백이 숙제로 하여금 굶어죽게 하느냐.

이 시가 쓰인 그림을 되돌려 받은 서거정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한다. 세조가 많은 사람의 원혼을 달래기 위하여 원각사를 짓고 대 법회를 열며 김시습을 불러 원혼을 달래며 국가태평을 기원케 하였다. 김시습이 사육신을 비롯한 수많은 충의지사(忠義之士)의 원혼을 위하여 강론을 하였는데 모든 사람이 도취하였다. 강론을 마친 김시습은 뒷문을 통하여 몰래 도망쳤다.

세조는 그에게 높은 벼슬을 주어 곁에 두고 싶어 김시습을 찾았으나 그는 이미 그곳을 빠져나온 뒤였다. 뒤따라 찾게 하자 그는 더러운 오물속에 들어가 얼굴을 가만히 내밀고 물끄러미 앉아 있었다.

김시습은 47세에 갑자기 머리를 기르고 결혼을 하였다. 사람들이 그에게 벼슬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끝내 뜻을 굽히지 않고 예전처럼 방랑생활을 하였다.

한번은 시장에서 아이들과 어울려 놀고 있는데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외쳤다.

“저놈이 벼슬을 그만 두어야 하는데.”보는 사람이 모두 꺼려하였으나 시습은 개의치 않았다. 종실 수천부정(秀川副正) 이정은(李貞恩), 남효온(南孝溫), 안응세(安應世), 홍유손(洪裕孫) 등은 끝까지 변치 않았다.

아내가 죽자 다시 산으로 들어가 중이 되어 강릉과 양양 사이를 오갔다. 이때 유자한(柳自漢)이 양양군수로 있었는데 그는 김시습을 극진하게 대접하고 가정을 찾으라고 권유하였다. 이때 김시습은 사양하는 편지를 썼다.

낙백하여 세속을 살기보다는 마음대로 소요하면서 생을 보내는 것이 났다. 59세에 서거하였는데 화장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는 생시의 자기의 자화상 두폭을 남기고 찬(贊)을 썼다.

네 모양은 너무도 막연하고
네 말은 너무도 미련하다.
언덕밑 구렁텅이로
너를 밀어 넣는 것이 마땅하다.

평범하게 살았으면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을 터인데 송죽같은 참 선비의 기상을 굽히지 않은 매월당은 당대의 지성과 기개와 고절의 표상인 생육신의 한분이다.

숙종조에 집의에 증직되고, 정조(正祖)조에 이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시호는 청간(淸簡)이다. 홍산(鴻山) 무량사에서 졸하여 절옆에 3년동안 묻어 놓았다가 장례할 때 보니 생시의 얼굴과 같았으므로 승려들이 부처님으로 여겼다.
리효종 기자 / 입력 : 2009년 04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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