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반적으로 뮤지컬 영화의 제작편수가 현저히 감소된 1960년대는 텔레비전 보급으로 인해 관객도 줄어들면서 뮤지컬 시장은 다른 장르에 비해 훨씬 큰 타격을 입었다. 그렇지만 작품성에서는 인정을 받았는데 아카데미상에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 작품들을 4편이나 만들어냈다. 아카데미상의 역사를 살펴볼 때 뮤지컬이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인데 10년 동안에 네 편이나 수상했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1960년대의 할리우드 뮤지컬은 브로드웨이 뮤지컬에 의존하며 사양길로 접어든 시기였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할리우드 뮤지컬은 더욱 처참한 길을 걷게 되는데 할리우드 뮤지컬의 종말이라고 할 만큼 현저하게 몰락하고 있었다.
미국의 전반적인 뮤지컬 시장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지방극장 사정이 나빠지고 그 결과로 지방에서 비용을 부담하지 못해 지방 시험공연 비용이 제작자들에게로 고스란히 떠넘겨지게 되었다. 그로 인해 제작자들은 검증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브로드웨이에 작품을 붙이고 단지 몇 일간의 시연회로 지방공연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들기에는 역부족이었으며 시간과 돈이 더 많이 필요했는데 급기야 대형영화사를 포함한 브로드웨이의 투자자들은 공연투자를 포기하고 엔젤투자에 몰려들었다. 엔젤투자란 보통 돈 있는 개인들이 혼자서 혹은 함께 모여서 투자모임을 결성하고 벤처기업이나 새로 창업하는 회사에 투자하면서 주식지분으로 대가를 받는 형태를 말한다. 위험성이 많은 투자형태였지만 1970년대 투자자들은 연극이나 영화에 투자하는 것 보다 엔젤투자 쪽을 더 선호했다. 마치 현재 우리나라의 영화투자자들이 영화투자에서 손을 떼고 다른 방향으로 투자를 선회하면서 영화시장을 공황상태로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인물도 없고 돈도 없는 브로드웨이는 그야말로 세계의 공연문화를 이끌고 있다는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고 20세기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오리지널 뮤지컬보다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에 의존하던 할리우드 뮤지컬은 더욱 더 처참했다. 1960년대 말부터 70년대에 걸쳐 할리우드 뮤지컬은 사실상 멸종에 가까운 시기였다. 현저하게 뮤지컬 영화 제작편수가 줄어든 것은 고사하고 작품의 재미적인 면에서도 대중들의 구미를 당기지 못했다. 할리우드 뮤지컬의 인기가 감소하면서 박스 오피스에서 뮤지컬들이 자취를 감추었거나 그나마 개봉된 작품들조차도 대부분 환영받지 못했다. 마치 만개한 꽃이 시들어 가는 것을 보는 것처럼 대중들 사이에서 흥미가 사라져갔던 것이다.
1970년대 할리우드 뮤지컬 시장은 1960년대처럼 성공한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영화화하는 것이 트렌드였다. 1960년대보다도 더 심하게 브로드웨이産 뮤지컬에 목매달고 있었다. 결국 오리지널 뮤지컬 영화들이 거의 제작되지 않았다는 것은 할리우드 뮤지컬의 몰락이 이미 현실화되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했다.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영화화한 1970년대 할리우드의 주요 뮤지컬들은 다음과 같다.
<온 어 클리어 데이 유 캔 씨 포에버(On a Clear Day You Can See Forever, 1970)> <지붕위의 바이올린(Fiddler on the Roof, 1971)> <라만차의 사나이(Man of La Mancha, 1972)> <카바레(Cabaret, 1972)>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Jesus Christ Superstar, 1973)> <록키 호러 픽쳐 쇼(The Rocky Horror Picture Show, 1975)> <그리스(Grease, 1978)> <어 리틀 나이트 뮤직(A Little Night Music, 1978)> <헤어(Hair, 1979)>
반면에 오리지널 뮤지컬 영화들은 극히 드물게 제작되었는데 <토요일 밤의 열기(Saturday Night Fever, 1977)>와 <올 댓 재즈(All That Jazz, 1979)> 등이 각각 박스 오피스와 작품성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밖에도 오리지널 뮤지컬 영화들이 몇 편 더 개봉되었지만 주목을 받지 못하고 기억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 중에서도 특히 <뉴욕, 뉴욕(New York, New York, 1977)>은 명장 마틴 스콜세지(Martin Scorsese)를 감독으로 영입하고 할리우드 스타 로버트 드 니로(Robert De Niro)와 라이자 미넬리(Liza Minnelli)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최고의 기대를 모았지만 흥행에서 참패를 맛보았다. 다만 주제곡 뉴욕, 뉴욕 이 1984년 LA올림픽에서 축하곡으로 연주될 정도로 세계적으로 대히트를 기록했을 뿐이었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이 실패로 인해 한동안 우울증과 약물에 빠지기도 했다고 술회하고 있는데 2005년에 발매된 <뉴욕, 뉴욕> DVD판의 서문에서 그는 영화의 실패 원인을 조심스럽게 피력했다. 그는 자신의 스타일인 불굴의 리얼리즘(gritty realism)을 버리고 고전적인 할리우드 뮤지컬 스타일로 접근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켜주지 못하고 실험적인 작품으로만 끝났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또 다른 오리지널 뮤지컬 영화로 노르웨이 작곡가 그리그(Edvard Grieg)의 전기를 다룬 <송 오브 노르웨이(Song of Norway, 1970)>와 프랑스 작가 생텍쥐페리(Saint-Exupery)의 소설을 뮤지컬화한 <어린 왕자(The Little Prince, 1974)>가 주목을 받았지만 역시 대실패로 끝났다. 특히 <어린 왕자>는 작사가 알란 제이 러너(Alan Jay Lerner, 1918~1986)와 작곡가인 프레데릭 로(Frederick Loewe, 1901~1988)의 마지막 합작품으로 기대감을 불러일으켰지만 다소 컬트적인 요소를 지닌 이들의 마지막 뮤지컬은 흥행과 비평에서 완전히 실패했다. <마이 페어 레이디(My Fair Lady)>와 <지지(Gigi)>로 명성을 얻은 명콤비의 쓸쓸한 마지막 무대였다.
1970년대 할리우드 뮤지컬은 아카데미상(오스카)에서도 <캬바레(Cabaret, 1972)>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캬바레>도 비록 8개의 상을 수상하기는 했지만 최우수 작품상을 <대부(The Godfather)>에게 빼앗겼다. <올 댓 재즈>도 당시 미국평단에서는 의견이 분분했지만 그해 프랑스 깐느 영화제(Cannes Film Festival)에서 대상인 팜 도르(Palme d'Or)를 수상하며 1970년대의 마지막을 장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