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시 왜구(倭寇)들의 침범으로 나라의 기둥이 뽑히려하고 겨레의 삶이 위태로울 무렵, 쫒기고 허둥대고 울부짖는 가운데 조정과 백성 모두가 어찌할 바를 몰랐었다. 그러할 때 벼슬하는 몸으로 사사로운 정리에 얽힘을 말끔히 끊어버리고 오로지 나라를 위하여 몸바칠 것을 결심하였고 끝내 일곱해 동안의 험코 어려운 풍진(風塵)을 헤쳐나가며 기울어져 가는 나라의 기둥을 다시 바로 세우는 데 가장 큰 공훈을 세운 인물이 바로 백사 이항복 선생이다.
백사(白沙) 이항복선생은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오성이 스물세살 때 만나 평생의 벗으로 옛날 관중(管仲)과 포숙(鮑叔)의 사이 못지 않게 가까웠던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과의 사이에서 빚어진 많은 일화들은 줄곧 이 땅에 태어난 사람들로 하여금 허리를 부둥켜안고 활짝 웃음을 터뜨리게할만한 풍자와 해학이 샘솟듯 흘러 넘쳤던 것이다.
오성은 어려서부터 타고난 몸매가 준수하고 총명함이 뛰어나 여러 가지 이야기거리를 남겼다. 연보에 보면, 여섯 살 때 집의 여종이 물건을 훔쳐 창틈으로 슬쩍 내던지는 것을 보고 그 물건을 집어 종에게 주며 얼른 제자리에 도로 갖다놓으라 이르고는 모른체 입을 다물었다고 한다. 속이 얼마나 깊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 여덟살 때에는, 부친이 칼과 거문고를 보고 시(詩)를 읊어보라고 명하자 곧
칼은 장부의 기상을 지녔고 검유장부기(劍有丈夫氣) 거문고는 태고의 마음을 간직했다. 금장태고심(琴藏太古心) 라고 하여 어른들도 깜짝 놀랬다고 한다.
그의 일생을 더듬어 볼 때 그야말로 문무(文武)의 두갈래 길에서 뛰어난 자취를 남겼을 뿐만아니라 어떠한 어려움속에서도 침착을 잃지 않고 조용히 처리해 나갔음은 자못 태고의 마음을 간직한 거문고의 가락과 같은 것이 아닐는지.
25세때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고, 36세에 도승지(都承旨)에 올랐다.
임금을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보필하는 높은 벼슬이다. 그러나 다음해 4월 왜구들이 강토를 짓밟는 변이 일어나자 도승지 오성은 가장 어려운 고비에서 맡은 바 임무를 극진히 수행하였다.
왜란이 일어나자 오성은 이때야말로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칠때라고 굳게 결심하여 집안사람이나 사사로운 일과 일체 인연을 끊다시피 하였다. 가족들이 잠깐만 얼굴이나 보자고 하여도 응하지 않은 채 임금을 모시고 피난길에 올랐다.
임진왜란 역사상 가장 부끄럽고 욕된 시기를 맞은 것이었다. 임금의 어가(御駕)를 모시고 허둥지둥 임진나루를 건너는 밤, 비는 쏟아지고 바람도 거세었다. 앞이 캄캄해진 선조는 대신들의 이름을 차례로 부르며 이 일을 장차 어찌했으면 좋으냐고, 누구든 어서 말을 해보라고 호통을 쳤다. 그러나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다.
그때 오성이 도승지로서 침착을 잃지 않고 앞으로의 계책을 아뢰었다. 잠시 북쪽으로 피해 있으면서 밖으로 명나라에 구원을 청하고 안으로는 팔도(八道)에 의병(義兵)을 널리 일으키도록 하자고 아뢰자, 선조는 내 생각이 바로 그런 것이라고 하면서 오성의 책략을 받아들였다.
피난길에서 임금의 지우(知遇)를 받은 오성은 이조참판, 형조판서, 대사헌, 병조판서등의 중요한 자리를 두루 거치면서 여섯해 동안 병조판서의 자리에 다섯 번이나 앉게 되었다는 것은 전쟁을 치름에 있어서 오성의 지혜와 계략이 누구보다도 뛰어났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45세에 벼슬로서는 임금 다음인 영의정에 올랐고 왜구들의 난리가 끝나 임금이 임진년 호가공신(扈駕功臣)들을 기록에 올릴 때 오성을 첫머리에 올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오성은 두 차례나 사양하였고 선조는 그대가 으뜸가는 공신이 아니라면 그 자리를 차지할 이름이 누구냐고 간곡히 타이르기도 하였다.
오성이 정승으로 있을 때 하급관리들이 찾아오면 늘 앉아서 절을 받곤 했다. 어느 날 늙은 훈도(訓導 : 정九품) 한사람이 찾아왔는데 오성은 그의 이름을 듣자마자 버선발로 뛰어나와 맞이하여 공손히 응대하였다. 이에 집안사람들이 괴상히 여겨 물었다. “보잘것없는 훈도를 맞으면서 왜 그렇게 공손하십니까?”
“저분은 내가 어릴 적에 서당에서 글을 배운 스승이다.”
이튿날이 되자 오성은 그가 묵고 있는 숙소로 찾아가 인사를 올리고 면포 10여단과 쌀 두섬을 주어 여비로 쓰게 하였다. 그러자 스승이 오성의 손을 잡으며 말하였다. 여비로 쓸 것은 쌀 두어 말이면 충분하네. 그러면서 나머지는 받지 않았다.
정인홍, 이이첨의 무리가 영창대군의 옥사와 함께 인목왕후에 대한 폐모론(廢母論)을 일으키자 오성은 상소를 올려 이에 극력 반대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광해군의 미움을 받아 귀양길에 올랐다. 이때 그는 다시 살아 돌아올 수 없음을 알고 가솔들에게 옷과 이불, 그리고 시체를 염할 물품을 갖추고 뒤따르게 했다.
북청으로 귀양가는 길에 그는 철령(鐵嶺)에 이르러 시를 한 수 지었다.
철령 높은 재에 자고가는 저구름아 고신원루(孤臣寃淚)를 비 삼아 띄워다가 임계신 구중궁궐(九重宮闕)에 뿌려본들 어떠리.
이 노래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곧 한양까지 퍼졌고 나중에는 궁궐안에서도 불렀다. 어느 날 광해군이 뜰에서 잔치를 하다가 술이 얼근히 취했는데 문득 이 노래가 들려왔다. 광해군은 궁인들에게 누가 이 노래를 지었느냐고 물었다. 궁인들이 사실대로 대답하자 광해군은 가만히 눈물을 흘리며 술자리를 끝냈다고 한다.
이항복(李恒福) 1556년(명종 11) ~ 1618년(광해군 10). 자는 자상(子常), 호는 백사(白沙), 필운(弼雲), 동강(東江), 청화진인(淸化眞人). 본관은 경주. 고려의 문화시중 제현(齊賢)의 후손. 참찬 몽량(夢亮)의 자.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호성일등공신(扈聖一等功臣). 청백리에 녹선. 시호는 문충(文忠). 포천의 화산서원(花山書院), 북청의 노덕서원(老德書院)에 제향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