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1441년(세종 23)~1468년(예종 1). 본관은 의령(宜寧). 어머니가 태종의 여섯째 딸 정선공주(貞善公主). 태종의 외손자. 권람의 사위.
1460년(세조 6) 무과에 급제, 세조의 총애를 받으면서 여러 무직을 지냈다.
1466년 다시 발영시(拔英試:영재를 선발하는 과거)에 급제 후 중북부 지방에 도적이 일어나자 왕명을 받들어 토벌하고, 이시애(李施愛)가 함경도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대장이 되어 평정하고 적개공신(敵愾功臣) 일등이 되고 의산군(宜山君)에 봉해지고 이어서 서쪽 건주위(建州衛)의 난동을 정벌하고 27세에 병조판서가 되므로써 모든 사람의 각광을 받았다. 그러나 이를 시기하는 무리가 있었다. 남이 장군은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돌아올 때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어느 날 궁궐 안에서 숙직하고 있을 때 하늘에 혜성이 나타났다. 남이는 혜성에 관해, 옛 말에 옛것을 없애고 새것을 펼 징조라는 말이 있다고 하였다.
이 말을 몰래 들은 유자광(柳子光)이 남이가 반역을 도모한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또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돌아올 때 지은 시중에「남아이십 미평국(男兒二十 未平國)」이 아니라「남아이십 미득국(男兒二十 未得國)」, 즉 남아가 이십에 나라를 얻지 못하면 누가 대장부라고 할 수 있느냐, 라고 지었다고 하였다.
남이는 결국 유자광의 모함으로 역모에 연루되어 이시애 난 때 같이 공을 세운 영의정 강순과 함께 신문을 받았다. 남이가 고문으로 종아리 뼈가 부서지자“강순이 나에게 시킨 일이요.” 하니, 강순이 얼굴이 노래지며 말했다.“거짓이요, 내 나이 이미 칠십이 넘었고 지위가 신하로서는 최고인 영의정 자리에 이르렀는데 무엇을 바라고 남이를 사주하겠소.”
강순은 고문에 못 이겨 거짓 자백을 한 후 땅을 치며 부르짖었다.“이놈아, 네가 나에게 무슨 원한이 있어 나를 끌어들이느냐?”
남이가 탄식하며 말했다.“내가 처음에 자백하지 않은 것은 훗날 공을 세우기 위해서였소. 그런데 이제는 종아리 뼈가 부러져 쓸모 없는 덩치만 남게 되었는데 더 살아본들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나 같은 젊은 사람도 죽음을 아끼지 않는데 머리가 허연 늙은이가 저만 살랴고 내가 무죄함을 알고도 영의정으로서 한마디 변명도 하지 않으니 참으로 가소롭구나. 영의정의 체통을 지켜라. 너 같은 영의정이 있으니 간신배가 판을 치고 무옥(誣獄:죄 없는 사람을 다스리는 옥)이 끊이지 않는다.”하였다.
결국 남이도 죽고, 저만 살려고 바른 소리 한번 못한 강순도 죽었다.
유자광은 출세가도를 달리다가 연산군 때 연산군을 부추겨 조선조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켜 어진 선비 수십 명을 죽게 한 강흉이다. 남이는 후에 신원 복권되고 충무(忠武)의 시호가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