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정선(사진, 인하대 교수, 문학과지성사 대표)
2.이해조와 이인직의 근본적 차이
우리 소설사는 대표적인 신소설 작가로 이인직과 이해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1930년대 말에 임화가 이인직이 개척한 신소설이 이해조에 의해 한층 공고한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내린 후 지금까지 이같은 평가는 변함 없이 이어져 왔습니다. 마르크시스트였던 임화는 봉건성에 대한 강렬한 부정과 근대성에 대한 적극적 옹호를 바탕으로 이인직과 이해조의 소설이 보여준 반봉건이란 공통점에 주목했고 그 결과 이 두 사람을 대단히 유사한, 사이좋은 신소설 작가로 사람들이 기억하게 만드는 오류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두 사람은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더 많습니다.
첫째, 이인직과 이해조는 출신이 뚜렷하게 달랐으며, 이 출신의 차이가 이들의 행동과 문학적 차이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해조는 1869년 생이며, 인조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의 10대손입니다. 반면에 이인직은 1862년 생이며, 비록 한산이씨 집안이라고 하지만 한미했던 것으로 미루어 아마도 서출이 아닌가 추측되고 있습니다. 이런 출신 배경 때문에 이인직은 조선왕조의 몰락에 대해 그다지 유감이 없었습니다. 당시 친일파의 상당수가 신분적 제약에 시달리던 한미한 출신이었듯이 이인직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인직이 자신의 출세를 제약하는 봉건적 조선사회에 대해 분노에 가까운 반감을 보여준 데 반해, 새로운 기회를 마련해준 근대 일본의 진출을 적극적으로 환영했습니다. 반면에 이해조는 조선왕조가 근대적인 변신을 통해 지속적으로 살아남기를 바랐습니다. 이해조는 신분제도의 폐해를 잘 알고 있었지만 반상등급의 혁파로 인한 질서의 문란을 더 걱정했으며, 국민을 주체로 한 국권회복을 위해 문필활동을 전개하면서도 군주제의 철폐를 바라지는 않았습니다. 이인직이 친일의 길을 걷고, 이해조가 애국계몽의 길을 걸은 것은 출신배경이 개인적 이해관계에 얽힌 문제에서 선택의 기제로 작용한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둘째, 이인직과 이해조는 근대적 사상을 받아들인 뿌리와 인간관계가 서로 달랐습니다. 이인직이 일본을 통해 근대적 사상을 받아들이고 일본과의 인연 속에서 인간관계를 구축한 반면에, 이해조는 성호 이익 등 국내실학파의 사상과 중국의 변법자강파를 통해 독학으로 근대사상을 학습한 후 애국계몽 운동을 통해 인간관계를 창출한 것입니다. 그 결과 이인직은 친일의 길을 치달리게 되었고, 이해조는 애국과 은둔이라는 불편한 길을 걷게 됩니다.
이인직은 1900년 일본유학을 떠나 동경정치학교에 입학하여 고마쯔(小松緣)의 제자가 되었는데, 이 고마쯔는 1906년 통감부의 외사국장이 되어 한일합방의 실무자로 활동했습니다. 이런 기회를 맞아 이인직은 친일의 하수인을 자청하여 이완용 내각의 강력한 후원을 받으며 기관지『대한신문』의 사장으로 활발하게 친일활동을 펼치게 됩니다. 이해조는 이와는 달리 실학사상을 매개로 양계초, 강유위 등 중국의 변법자강파의 근대사상을 흡입했으며, 당시 대표적인 애국계몽지였던 『제국신문』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종일, 오세창 등 애국적인 민족주의자들과 사귀었습니다. 그리고‘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기 위해 토론체 소설 『자유종』을 썼습니다.
셋째, 이인직과 이해조는 당시의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이 서로 판이했습니다. 이 점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데 이를테면 의병전쟁에 대한 소설 속의 묘사가 한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이인직은 자신의 소설에서 당시의 의병들을 화적(火賊) 떼로 규정하면서 양민을 괴롭히고 재물을 약탈하는 무리로 단정합니다. 그런데 이해조는 1907년 광무사(光武社)의 최익현 비밀 추도회에 참가한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의병전쟁을 의도적으로 나쁘게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척화도 형편대로 하는 것이지 붓끝으로만 척화 척화하면 척화가 되오”라는 주장에서 알 수 있듯, 말로만 척화(斥和)를 외치는,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 수구를 고집하는 양반들의 행태에 동조하지 않았을 따름입니다. 또 신분제도 철폐를 비롯한 각종 현실변화를 이인직은 쌍수를 들어 환영했지만 이해조는 차분하게 득실을 따지며 지지하거나 반대했습니다. “우리나라 경장 대신들이 양반의 폐만 생각하고 양반의 공효는 생각지 못하야 졸지에 반상 등급을 혁파하니 누가 상쾌치 아니하겠소마는 국가질서의 문란을 양반보다 더 심한 자 많으니 어찌 정치가의 수단이라 인정하겠소”라는 이해조의 말에는 신분제도의 철폐를 지지하면서도 그 후의 문제까지를 걱정하는 신중한 태도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넷째, 이인직과 이해조는 모두 개화파에 속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지만 전자는 친일적 개화파이고 후자는 애국적 개화파라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이인직은 봉건적인 사회를 변화시키는 개화가 누구에 의해 추진되던 아랑곳하지 않고 개화를 지지한 결과 점차‘신념의 친일파’로 변모했지만, 이해조는 개화의 이면에 제국주의 국가들의 수탈과 지배가 들어 있는 것을 간파했기 때문에 그렇게 변모할 수 없었습니다. 또 이해조가 양반 지식인을 기초로 한 점진적 변혁을 꿈꾸고, 기독교를 정신적 지주로 삼는 서구사회에 대응해서 유교를 개혁한 공자교를 우리의 정신적 지주로 구상하는 것도 이인직과 구별되는, 경박하지 않은 면모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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