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량 :1491년(성종 22) ~ 1554년(명종 5)
본관은 태인(泰仁). 장성(長城) 출신. 1513년(중종 8) 진사가 되고 이듬해 문과에 급제, 지평(持平), 장령(掌令), 승지(承旨), 호조참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공조·형조·예조판서, 우·좌 참찬, 전라도 관찰사, 도총관(都摠管), 한성판윤 등을 38년 동안 역임하면서 육경(六卿)의 자리까지 이르는 관직생활을 하였다. 대학자 주세붕(周世鵬) 등과 교유하며 유림간의 학자로서 존경을 받은 인물이다.
고위직에 있을 때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뇌물은 물론 부정이라는 것을 모르고 지냈다. 그가 형조판서로 있을 때 같은 판서직에 있던 사람의 친동생이 광주목사로서 비리가 발견되자 묵인하여 주지 않고 끝내 파면하였다. 그는 언제나 모든 것을 바르게 처리했고 임금께도 직언을 잘하는 꿋꿋한 성품이었다. 임금께 아첨하는 것은 국정을 어지럽게 하는 근원이고 뇌물을 밖에서 들어오게 하는 것은 정치를 해롭게 만든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이것은 바로 국정을 바로 하는데 있어 저해요소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박수량은 청렴한 사람으로서 내외의 요직을 역임하였으며 중종, 인종, 명종의 삼조(三朝)를 거치는 동안 국사를 보았지만 특히 명종의 신임이 두터워 간성지신(干城之臣)으로 조야에 이름을 떨쳤다.
그런데 명종조 소윤(小尹)·대윤(大尹)의 사화가 심할 때 국유물을 사유하였다는 모략이 있어 명종이 암행어사를 보내 진상을 조사케 하였다. 과객으로 가장한 어사가 박수량의 사가에 가보니 대여섯간 집에 석가래가 썩어내려 앉을 지경이고 빗물이 샐 정도이며 식생활도 아주 좋지 않았다. 어사가 사실대로 보고하였다. 그러나 명종은 다시 다른 어사를 보내 재확인하니 사실 그대로였다. 참으로 청백지신이로다. 벼슬길 30여년 지위가 경상(卿相)까지 이르렀으면서도 그렇게 청빈하게 사는구나 칭찬하면서 그 고향 하남(河南)골 양지 바른 곳에 집을 지어주고 청백당(淸白堂)이라 이름지어 주었다.
그가 61세때 좌참찬을 마지막으로 노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사직을 요청하니 명종은 사표를 수리하지 않고 전라도 관찰사로 자리를 옮겨 주었다.
그 사이에도 박수량은 청백당에서 노모를 봉양한지 1년 만에 또다시 우참찬, 한성판윤에 임명하였다.
그가 64세에 졸하니 그의 청백한 생활은 그의 묘비(墓碑)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박수량의 청렴결백한 행동에 감동한 명종은 어명을 내려 서해바다 암석에서 돌을 골라 하사하면서 박수량의 청렴결백함을 알면서 비석에다 새삼스럽게 결백했던 생활상을 쓴다는 것은 오히려 그의 청렴함을 잘못 아는 결과가 될지도 모른다면서 비문없이 그대로 세우라 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유명한 백비(白碑)라 하는 것이다. 백비 옆에 비명(碑銘)은 호남의 명유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가, 신도비명(神道碑銘)은 안병선(安秉璿)이 썼는데 모두가 청렴결백이 박수량과 견줄 사람이 없다는 내용의 글이다.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고 시호는 정혜(貞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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