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계를 도모함이 너무 졸렬하니 이것이 이것이 ‘우(愚:바보)’가 아니고 무엇이며, ‘산수(山水)’를 즐기다보니 너무 산수를 독점하는 것 같다. 이 또한 과분(過分)한 줄 이제야 알았노라. 내가 본래, 타고 난 ‘천성(天性)’이 ‘우(愚:바보)’인 것 같아 차라리 ‘우(愚)’를 지키는 것으로서 ‘헌호(軒號)’를 삼고 ‘수우(守愚)’로서 스스로 경계하리로다.
이는 호, 즉, 당호(堂號)’를 수우당(守愚堂)이라 짓는 바를 시로 지은 것이다. 1630년(인조 8년) 영동현감으로 재직 당시, 우직(愚直)한 사람이라는 평(評)을 받게 되자 곧 관직에서 물러나 내 고향 포천 땅에서 살면서 자연 속에 묻히어 시부(詩賦)를 지으며 살았다. 가산면 정교리 솥다리 마을에서 살았으며 이곳에 묘가 있다.
본관은 전주이다. 광해군 1년(1609) 사마시에 합격한 후, 세마(洗馬)가 되었다가 얼마 후에 원외랑(員外郞)이 되었다. 광해군 5년 인목대비의 폐모론이 대두되면서 정정(政情)이 불안하자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그만두고 낙향하여 살았다. 광해군 10년 부친상을 당하여 거상(居喪)하였는데 인조반정 이후에 다시 기용되었으며 인조5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인조가 강화도로 난을 피했는데 이시백님은 ‘사헌부 감찰’로서 인조를 호종하였다.
벼슬길에서 물러나서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망궐례(望闕禮:임금이 계씬 대궐 쪽을 향해 절을 올리는 예)를 올리고 난 다음, 자기 조상님 사당에 배알하였다. 충(忠), 효(孝)를 겸비하고 실천한 선비였다.
이 소문을 들은 인조임금이 ‘영유현령’을 제수하였으나 사양하고 응하지 않았다한다. 그 후, 재차 종친부 전부를 제수하니 부득이 응하였다. 인조13년(1635년) ‘연한 편람(燕閑便覽)’이라는 상소문 10개조를 올리자 인조가 크게 칭찬하였다 한다. ‘연한 편람’이 상소10개조를 올린데 대한 상으로 표피(豹皮:표범의 껍질로 만든 겉옷)를 하사하였다 한다. 충신에 대한 임금의 은전이었다.
인조14년(1636년) 병자호란 이후로는 병을 핑계로 벼슬에서 물러나 술과 거문고를 벗 삼아 세월을 낚으며 살았다 한다. 인조27년(1649년) 향년 79세로 타계하니 신선 같았다. 포천 솥다리 마을을 사랑하는 선비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