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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선비정신(123)

고을의 품관들에게 나물죽을 대접했던 이지함
리효종 기자 / jun28258@gmail.com입력 : 2008년 12월 22일


한국한시사포천지사장 리효종


이지함(1517~1578)의 본관은 한산(韓山)이고, 자는 형중(馨仲), 호는 토정(土亭)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그의 형 이지번(李之蕃)에게 글을 배웠다.


장성하여 모산수(毛山守) 이성랑(李星琅)의 사위가 되었다. 결혼식을 올린 이튿날 외출하였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돌아왔는데 그가 입고 갔던 명주 도포가 없어진 것을 알고 집안사람이 물으니 대답하였다.


"홍제원(弘濟院) 다리를 지나다가 거지아이가 추위에 얼어 신음하는 것을 보고 찢어서 세 아이에게 나누어 주었다."


어느 날 자기형에게 말하였다.


"제가 저의 처가를 관찰하였더니 길(吉)한 기운이 없습니다. 그곳을 떠나지 않으면 장차 재화가 미칠 것입니다."


그가 처자(妻子)를 데리고 서쪽으로 갔는데, 이듬해에 정말 재화가 일어나 모면하게 되었다.


이지함은 또 배를 부려 넓은 바다를 평지처럼 다녔으며, 국내의 산천은 거리가 멀다고 하여 안 간 곳이 없었다. 그리고 여러 해 동안 떠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는 또 평상시 자제들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여색을 경계하라. 여색에 대한 경계를 엄격히 하지 않으면 그 나머지는 볼 것이 없다."


이지함은 배고픈 것을 참지 참아보려고 열흘 동안 불에 익힌 음식을 먹지 않았으며, 목마른 것을 참아보려고 한더위에 물을 끊기도 하였고, 고달픈 것을 참아보려고 발이 부르트도록 걷기도 하였다.


그는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에게 글을 배우기도 하였다. 그는 늘 무명옷에다 짚신 차림으로 솜옷을 짊어지고 다니며 사대부의 집에 가서 어울려 놀면서 곁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기탄없는 언행을 하였고 여러 방면의 잡술(雜術)에 환하게 통달하였다. 큰 박을 네 모서리에 매단 거룻배를 타고 노도 사용하지 않은 채 세 번이나 제주(濟州)에 들어갔지만, 풍파의 위험을 겪지 않았다. 그때마다 장사를 하여 맨손으로 경영한 사업이 몇 년 사이에 수천 석의 곡식을 축적하여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에게 모두 나누어주고는 소매를 털고 떠났다.


또 섬에 들어가 오이를 길러 그것으로 곡식을 샀으며, 또 여러 척의 배로 경강(京江 : 한강)에 이르러서는 낮고 습기가 있는 곳에다 흙으로 축대를 쌓았는데 높이가 수십 자나 되었다. 거기에다 흙집을 지어 밤에는 흙집에서 자고 낮에는 흙집 위에 올라가 지냈는데, 그 흙집을 토정(土亭)이라 하였다. 그 곳에서 얼마 동안 살다가 버렸다.


그는 또 쇠로 갓을 만들어 쓰다가 벗어서는 거기에다 밥을 지어먹기도 하였으며, 끝나면 씻어서 다시 쓰곤 하였다(지금의 벙거지가 이것이다). 더러는 패랭이를 쓰고 거친 칡 옷에다 나막신을 신고 팔도를 두루 돌아다니며 스스로 천한 사람의 일을 하여 밑바닥 생활까지 모르는 것이 없었다.


그는 일생동안 남에게 맞아본 적이 없었다. 그가 하루는 느닷없이 민가에 침입하여 어느 부부(夫婦)곁에 앉아 있었다. 주인이 크게 화를 내어 그를 때리려고 하다가 그가 늙은 사람이라 온화한 말로 내쫒기만 하였다. 또 볼기 맞는 형벌을 받아보려고 일부러 높은 관원이 지나가는 앞길을 범하였더니 그 관원이 화를 내어 볼기를 치려고 하다가 자세히 살펴보고는 그 모습이 이상하므로 볼기 치려던 것을 그만 두었다.


그의 할아버지 장례를 치르는데 장사지낸 묘터를 보니 자손 중에 반드시 두 사람의 정승이 나올 터이기는 하지만 막내아들에게는 불길(不吉)하다는 터였는데, 막내아들이란 바로 이지함 그였다. 그러나 이지함은 스스로 그 불길한 것을 떠맡겠다고 하였는데, 뒤에 그의 조카 이산해(李山海)는 정승이 되었고, 이산보(李山甫)은 벼슬이 1품이었지만 그의 아들은 현달하지 못하였다.


포천현감(抱川縣監)이 되어 다갈색 무명베옷에다 짚신을 신고 부임하니 딸린 관속들이 음식을 차려 올렸는데, 이지함이 눈여겨 자세히 보고는 수저를 들어보지도 않고 말하였다.


"먹을 것이 없다."


아전들이 뜰에 꿇어앉아 아뢰었다.


"고을에 토산물이 없어 차린 음식에 특별한 것이 없었으니 다시 차려 올리겠습니다."


조금 있다가 진수성찬을 차렸지만 이지함은 또 앞서와 같이 말할 뿐이었다.


"먹을 것이 없다."


아전들이 겁을 내어 벌벌 떨면서 죄주기를 바라므로 이지함이 말했다.


"우리나라 백성들의 생활이 어렵고 고달픈 것은 모두 먹고 마시는데 절제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음식을 차릴 때에 소반 사용하는 것을 몹시 싫어한다. 오곡(五穀)을 섞어서 지은 밥 한 그릇과 나물을 넣어 끓인 국 한 그릇을 갈모(笠帽)나 갑(匣)에 담아서 올리라."


이튿날 포천 고을 안의 품관(品官)이 인사하러 찾아오자 말린 나물로 죽을 쑤게 하여 그 죽을 들도록 권하였다. 품관들은 갓을 나직이 내려 숟가락을 들고서 조금 먹다가 조금 토하곤 하였는데 이지함은 한 그릇을 다 먹었다. 그러다 얼마 있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니 고을 사람들이 길을 막으며 만류하였지만 막을 수가 없었다.


그는 경사자전(經史子傳)에 통달하고 또한 수학에도 정통했으며 항상 주경궁리(主敬窮理)를 학문의 방법으로 삼았다.


1578년(선조 11) 아산현감(牙山縣監)이 되어 걸인청(乞人廳)을 만들어 관내 걸인의 수용과 노약자와 기민(飢民) 구호에 힘쓰다가 재직중에 과로로 졸하였다. 물욕이 없어 평생토록 가난한 생활을 했고 의약(醫藥), 복서(卜筮), 천문, 지리, 음양, 술서(術書)에 관한 일화가 많다. 특히 토정비결(土亭秘訣)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 보령의 화암서원(花巖書院)에 제향되었다.

리효종 기자 / jun28258@gmail.com입력 : 2008년 12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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