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애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기 있는 소재의 하나였으며 그동안 많은 명작들이 탄생되었다. 하지만 부성애를 다룬 드라마는 그리 많지 않다. <챔프(The Champ)>는 1979년에 개봉되어 한 때 전 세계인의 눈시울을 젖게 만들었던 아버지를 소재로 한 영화다. 술에 빠져 사는 은퇴한 권투선수가 아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다시 링 위에 오르게 되지만 아들이 보는 앞에서 죽어간다는 내용이다. 같은 해에 만들어진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Kramer vs. Kramer)>도 가정의 소중함과 아버지의 역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주는 영화였고 21세기에 들어서는 <존 큐(John Q, 2002)>가 부성애의 한 단면을 눈물겹게 보여주었다. 종종 정통연극의 소재로도 차용되기는 했지만 뮤지컬의 소재로는 별로 인기가 없었으며 거의 전무하다고 할 수 있다. 뮤지컬의 특성상, 적어도 1960년대 이전까지는 남녀 간의 사랑이나 백스테이지(Backstage)를 다룬 뮤지컬들이 대세를 이루었고 상업적인 측면에서 아버지를 소재로 한 무대 뮤지컬은 제작자들의 흥행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렇지만 1960년대 격변의 시대를 맞이하면서 다양한 소재가 요구되어졌고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듯 1946년에 명작 뮤지컬 한 편이 만들어졌다.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된 <지붕위의 바이올린(Fiddler on the Roof)>은 아버지를 소재로 한 전무후무한 명작 뮤지컬인데 현재까지도 전 세계의 극장에서 끊임없이 공연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한 때 서울시립뮤지컬단의 단골 레퍼토리로 꾸준히 공연되었었고 현재도 서울의 국립극장에서 다시 공연되고 있는데 특히 12월에 어울리는 감동적이며 인상 깊은 뮤지컬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작품의 내용에 공감하지 못하는 관객들도 많이 있다. 유대인들의 풍습과 기질을 비롯해서 그들의 내면적인 신앙과 일상생활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유대인들의 삶이 현재 우리의 삶과 별다르지 않고 아버지의 사랑과 시련 그리고 가족애는 범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내용이라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훨씬 많다. 특히 이 뮤지컬은 20세기 전반기에 일어났던 러시아 혁명과 유대인에 대한 핍박이 작품의 기저에 흐르고 있어 정치사회적인 측면에서도 깊이가 있는 뮤지컬이다. 극중에서 시대가 변하면서 주인공의 딸들의 가치관도 변화하게 되는데 그런 와중에서도 전통에 대한 자부심과 신앙심을 잃지 않고 낙천적으로 가정을 꾸려가는 아버지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1960년대는 소재의 다양성뿐만 아니라 음악적으로도 다양한 음악을 차용한 뮤지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1950년대 까지 재즈에 기반을 두었던 뮤지컬 음악이 록 음악으로 대체 되었고 <지붕위의 바이올린>도 재즈적인 요소를 버리고 우크라이나 민속음악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그 결과 역대 박스 오피스 기록을 갱신하며 3,000회 공연을 넘어서는 상업적으로도 최고의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 최장기 공연의 대기록은 그 후 10년 동안 깨지지 않았으며 그 해 9개의 토니상을 휩쓸며 전 세계에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1905년 러시아 우크라이나 지방의 작은 마을 유대인 부락에서 우유가공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테비에는 가난한 삶에도 불구하고 신앙심이 깊은 남자다. 그는 수다스런 아내와 다섯 명의 딸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아간다. 그러던 중 장녀가 양복점 직공과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아버지와 상의도 없이 그와 결혼을 하겠다고 한다. 전통을 존중하는 테비에는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딸의 의지를 꺾을 수 없어 결혼을 승낙하고 만다. 그런데 결혼식이 열리는 식장에 러시아 경관이 들이닥쳐 식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만다. 러시아 혁명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며 특히 유대인 마을에 혹독한 시련이 덮치게 된 것이다. 장녀의 결혼식이 끝나자 이번에는 둘째딸이 역시 가난한 청년과 결혼을 하겠다고 선언한다. 설상가상으로 셋째 아이도 러시아 청년과 사랑에 빠져 몰래 아버지로 부터 도망쳐버린다. 러시아 혁명으로 상황이 매일 악화되고 있을 때 테비에가 살고 있는 마을에 날벼락이 떨어진다. 유대인을 그 지역에서 퇴출시키기 위해 이주명령이 떨어진 것이었다. 테비에를 비롯한 그 마을의 유대인들은 정든 땅을 버리고 새로운 나라 머나먼 미국으로 향한다."
물론 이 뮤지컬의 밑바탕에 흐르는 정서는 슬픔이다. 이스라엘이 건국되기 전까지 억압과 편견 속에서 정착지를 찾아 전 세계를 떠돌아다녔던 유대인 유목민들의 정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슬픔을 끌어안으며 구시대적 가치를 잘 지켜나가는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이 감동적이며 억압과 편견을 이겨내는 유대인 가정을 따뜻한 시각으로 조명했기 때문에 범세계적인 뮤지컬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극중 가장 유명한 노래 "해가 뜨고, 해가 지고(Sunrise Sunset)"는 세상의 모든 부모와 자식을 위한 세레나데라고 할 수 있다.- 딸을 시집보내는 날, 유랑생활로 심신이 지친 유대인들이지만 모두가 자신의 일처럼 축하하러 모인다. 그러나 생활의 슬픔은 어찌할 수가 없다. 우울한 분위기가 일순간 흐르지만 아버지는 바이올린을 들고 "해가 뜨고, 해가 지고(Sunrise Sunset)"를 연주한다.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함께 노래를 부른다.
이 처녀가 내가 안고 다니던 바로 그 작은 소녀였던가?/ 이 청년이 놀이에 열중하던 그 장난꾸러기 소년이었던가?/ 난 나이 먹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데/ 언제 우리 아이들은 이렇게 나이가 들었나?/ (중략) 해가 뜨고, 해가 지고, 해가 뜨고, 해가 지고/ 세월은 화살처럼 흘러가고 있구나. (후략)
단순히 즐겁고 행복한 뮤지컬을 원한다면 <지붕위의 바이올린>을 권하고 싶진 않다. 뮤지컬 코미디를 선호하고 있는 관객이라면 다분히 지루하고 따분할 수도 있는 뮤지컬이기 때문이다. 특히 주인공 테비에 역을 어떤 배우가 연기하느냐에 따라 작품의 재미와 완성도가 천차만별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서울에서 공연되고 있는 버전은 주인공이 노주현이라는 탤런트라는 점에서 빛을 잃고 코미디로 전락하고 있다. 좋은 배우이긴 하지만 테비에 역에는 역부족이며 치명적인 미스캐스팅이다. <지붕위의 바이올린>의 가슴 뭉클하고 진지한 감동을 느껴보고 싶다면 전혀 권하고 싶지 않은 공연이며 차라리 현재 시중에 DVD로 발매되고 있는 영화버전을 권하고 싶다. 올 겨울 한 번쯤 부성애와 가족의 의미를 이 한 편의 뮤지컬을 통해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