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임(한국영상제작학회 명예회장)
녹명(鹿鳴)이라는 말과 내명(內明)이라는 말이 있다. 보통 사람들에겐 생소한 말이나 글을 읽은 선비들 사이엔 귀에 익은 말이다. 녹명이란 사슴의 울음이다. 사슴은 먹이를 발견하면 그 울음으로 먹이를 찾지 못한 다른 사슴들을 부른다. 혼자 독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무리를 생각하는 것이다. 먹이를 찾지 못해 배고파하는 다른 사슴들을 생각하는 것이다. 내명이란 겉으로 폼잡지 않고 속으로 슬기롭다는 것이다. 뽐내지 않는 것이다. 자랑하지 않는 것이다. 하심(下心)을 생각하는 것이다. 남 앞에 겸허히 고개 숙이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살피는 것이다. 성찰(省察)하는 것이다. 이(利)를 보면 의(義)를 생각하라 했는데 과연 의 앞에 떳떳한가? 자문하는 것이다.
녹명이란 더불어 사는 지혜(智慧)를 말하는 것이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을 말하는 것이다. 너도 잘 살고 나도 잘 살고 다 함께 잘 살자는 것이다. 이 이상 더 위대(偉大)한 가르침이 어디 있는가? 이 이상 더 위대한 정신(精神)이 어디 있는가? 그래서 녹명의 세계에선 싸움이 없다. 다툼도 없다. 먹이가 있으면 동료를 부르고 같이 뜯어먹으니 다툼이 일어날리 없는 것이다. 싸움이 일어날리 없는 것이다. 그곳엔 평화와 고요만 깃들뿐이다.
일반 동물은 배가 부르면 더 이상 사냥하지 않는다. 동물의 왕국을 보라! 백수(百獸)의 왕이라고 하는 사자도 배가 부르면 더 이상 약한 짐승들을 쫓지 않는다. 공존(共存)하는 것이다. 약한 짐승들은 먹이를 하나 던져주고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받는 것이다. 배가 부른 동안은 저들을 지켜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은 그렇지 않다. 만물의 영장(靈長)이라고 하는 사람[人間]은 그렇지 않다. 배가 불러도 사냥을 한다. 흘러 넘쳐도 욕심(慾心)을 부린다. 그 순간 업(業)을 짓는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잘 알아야 한다. 업보(業報)가 되어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질량불변(質量不變)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이 법칙을 부정(否定)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질량이 불변이라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나가 오면 반드시 하나가 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균형(均衡)이 이루어지고 조화(調和)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질량불변의 법칙을 받쳐주는 그랜드 디오리(Grand theory)가 있다면 그것은 균형과 조화일 것이다. 균형과 조화라는 잣대 속에 만물(萬物)이 오고가기 때문에 질량불변의 법칙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는 순간 사람들은 겸허(謙虛)해지고 겸손(謙遜)해지는 것이다.
녹명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내명에도 귀 기울여야 한다. 내명이란 양심(良心)의 소리이다. 깨우침의 소리이다. 홍익인간의 잣대로 살았는가? 탐진치(貪嗔癡)의 잣대로 살았는가? 되돌아보는 것이다. 성찰(省察)하는 것이다.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는 것은 자연의 가르침에 귀 기울인다는 것이다. 자연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는가? 항상 반추(反芻)하는 것이다.
반추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행(行)으로 이어져야 한다. 행으로 녹명의 길을 가야 한다.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한다. 덕(德)을 쌓아야 한다. 덕이란 어려운 것이 아니다. 덕이란 베푸는 것이다. 조건 없이 베푸는 것이다. 선(善)을 쌓는 것이다. 그래서 적선(積善)이라 하는 것이다. 베푸는 가운데 덕이 쌓이는 것이다.
착한 삶을 살라고 하면서 자신은 위선(僞善)이나 도선(盜善)을 하지 않았는가? 살펴볼 일이다. 위선이란 말로만 떠드는 것이다.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 것이다. 립써비스(lip service)만 하는 것이다. 도선이란 남의 선행(善行)을 훔치는 것이다. 남이 한 선행을 가로채는 것이다. 위선자나 도선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적선자(積善者)가 되어야 한다. 이웃의 고통과 슬픔을 같이 하는 적선자가 되어야 한다. 가만히 귀 기울여 보라. 혹시 사슴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아니 거들먹거렸던 자신을 채찍질하는 내명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되돌아보고 또 되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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