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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의 선비정신 119] 내 비석에 큰 눈을 두 개 새겨다오


포천신문 기자 / jun28258@gmail.com입력 : 2008년 11월 12일




한국한시협회 포천지회장  리 효 종

 

조만식은 33세의 나이에 오산학교 교장이 되어 봉급도 받지 않고 일했다. 그는 국산품 애용운동을 벌이면서 이를 철저하게 실천하였다. 그는 치약을 쓰지 않고 소금으로 양치질을 하였고, 일제 비누 대신 우리의 팥으로 만든 비누를 사용했다.

 

 3·1운동과 해외망명의 죄목으로 1년형을 선고받고 평양감옥에 수감되었을 때였다. 그때 감옥에서는 어린아이 주먹만한 수수싸라기 밥을 주었는데, 조만식은 일단 그것을 받으면 반으로 쪼개 다른 사람에게 주고 나머지를 먹었다.

 

아들 연명은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구두가 몹시 갖고 싶었다. 소학교 때부터 검정 버선만 신어온 그에게는 구두를 신어보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었다. 아들은 아버지 몰래 에나멜을 칠한 구두 한 켤레를 사서 집으로 가져왔다. 그러자 조만식은 대뜸 이렇게 말했다.

 

“가위를 가져 오너라.”

 

아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가위를 가져다 주었다. 그러자 조만식은 가위를 들고 새 구두를 싹둑싹둑 잘라버렸다. 그러면서 아들을 데리고 구두를 판 가게에 가서 말했다.

 

“이제 갓 중학교를 졸업한 녀석에게 그런 사치품을 쓰게 하면 어떡하나?”

 

그는 딸이 결혼해도 면사포를 쓰지 못하게 했다. 그리하여 딸은 하얀 모시치마에 모시적삼을 입고 결혼식을 올렸다.

 

조선일보사 사장이 되었을 때도 그는 검소함을 잃지 않았다. 점심시간이면 그는 허름한 음식점에 들어가 10전짜리 국수를 주문하였다. 식사가 끝나면 그는 미리 준비해둔 10전짜리 동전을 탁자위에 남겨두고 나가는 것이었다.

 

둘째아들 연창이 서울보성전문학교에 다닐 때였다. 하루는 평양경찰서 고등계 주임 마쓰모토가 통역관을 데리고 그를 찾아왔다. 마쓰모토가 찾아오자 그는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안질이 있어서 눈을 뜨지 못하겠소.”

 

마쓰모토는 둘째아들을 일본군에 입대시키는 것이 어떻겠냐고 의중을 떠보았다. 항일운동가의 아들이 학도병에 지원하게 되면 반일감정을 갖고 있던 다른 사람들에게 커다란 선전효과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조만식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당신들은 일본과 조선 백성이 평등하다고 떠들어대는데, 우리 젊은이들을 전쟁터에 끌어다가 희생시키는 것이 평등한 것이오? 나는 그런 개죽음을 당하는 곳에 내 자식을 보낼 수 없소.”

 

마쓰모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마침 집에서 차를 내왔는데 마쓰모토가 보니 커피 같았다. 마쓰모토가 짐짓 화풀이를 했다.
“선생은 조선 물산을 애용하자고 주장하면서 어떻게 이런 커피를 마십니까?”

 

그때 조만식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천연스럽게 대꾸했다.
“이건 검은 콩을 볶아 만든 우리 차입니다.”

 

신문사를 그만두고 평양으로 돌아왔을 때 부인이 위중한 병이 걸렸다. 그리하여 그는 부인을 서울 세브란스병원에 입원시켰다. 수술을 마치고 당분간 물을 마실 수 없었는데 그때 간호원이 오렌지즙을 입술에 발라주면 갈증을 덜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는 새벽 4시에 오렌지를 구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하지만 오렌지를 파는 가게는 모두 일본인들이 경영하는 가게였다. 결국 그는 남대문시장까지 걸어갔다. 하지만 너무 이른 시간이라 가게문이 닫혀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조선인이 경영하는 가게가 문을 열 때까지 몇 시간 동안이나 기다렸다가 오렌지 몇 개를 사왔다.

 

말년에 이르러 그는 아들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죽은 뒤 비석을 세우려거든 거기에 비문을 쓰지 말고 큰 눈을 두 개 새겨다오. 저승에 가서라도 한 눈으로는 일본이 망하는 것을 보고, 다른 한 눈으로는 조국의 자주독립을 지켜볼 것이다.”

 

소련군이 북한을 점령하자 그의 친지와 제자들은 남한으로 옮겨 갈 것을 권하였다. 38선이 그어지면서 그를 모시고 와야 한다는 운동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이에 응하지 않았다.

 

“나는 염려하지 마시오. 나는 이곳에 남아 있는 백성들과 운명을 함께 하기로 결심했소. 나 때문에 수고할 필요 없소.”

 

결국 그는 북한에 남아 있다가 그곳에서 삶을 마감했다.

 

조만식(曺晩植)
1882년(고종 19) ~ ?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호는 고당(古堂)이다. 23세 때 평양 숭실중학(崇實中學)에 입학하였고, 1908년 일본 동경에 유학하여 1913년 메이지 대학(明治大學) 법학부를 졸업한 후 오산학교 교사가 되고 2년후 교장이 되었다.

 

1919년 3·1 운동에 참가하였다가 1년간 옥고를 치르고 오산학교 교장으로 복귀하였으나 일본 관헌의 탄압을 받아 평양으로 돌아가 기독교 활동에 전념하였다. 1922년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하여 국산품 애용운동을 벌였다. 1927년 신간회(新幹會)에 참여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활동이 좌절되었으며 1932년 조선일보사 사장에 추대되었다.

 

광복 직후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그 위원장이 되고, 소련군이 북조선인민정치위원회위원장에 취임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거절하였다. 그해 11월 3일 조선민주당(朝鮮民主黨)의 당수가 되어 반탁운동을 전개하다가 소련군에 의해 고려호텔에 연금된 이후 행적이 묘연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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