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효종(한국한시협회 포천지회장)
동학혁명이 일어났을 때 김창숙은 어린 나이로 서당에 다니고 있었다. 하루는 친구들과 글을 읽고 있는데 아버지가 학생들을 불러 놓고 말했다.
“너희는 부모님이 주시는 밥을 먹고 옷을 입으며 앉아서 한가로이 옛 글만 읽고 있다. 지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밖에서 모내기를 하는 농부들의 노고가 얼마나 심한지 아느냐?”
그러면서 아버지는 밖에 나가 농부들의 일손을 도우라고 명했다. 점심때가 되자 농부들과 함께 불러놓고 아버지가 말했다.
“오늘은 너희도 다 농부들이다. 누가 천하고 귀한가를 따질 필요 없다.”그러고는 밥 짓는 여자아이를 시켜 점심을 주었는데, 늙은 종들에게 먼저 주고 학생들은 맨 나중에 주게 하였다. 밥을 먹고 나자 아버지는 다시 말했다.
“지금 세상이 크게 변해가고 있는데 너희가 『주역』을 읽고도 변화의 이치를 모르면 되겠느냐? 앞으로 너희는 내 말을 명심하여 올바로 살아갈 길을 강구하도록 하라.”이후 김창숙은 공부에 열중했다. 1908년 대한협회가 창설되자 그는 총무로 참여하여 유림들을 모으고, 국채보상운동이 벌어지자 성주군 대표로 참여하였다. 그런데 일진회 대표 김상범이 전국에서 모은 돈을 전부 중앙에 집결시킨 다음 각 정당의 감독을 통해 처리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자 김창숙이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이 소중한 돈을 일진회 같은 매국노들에게 맡길 수는 없소. 국채를 상환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교육기관에 투자하여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옳소. 나는 돌아가 우리 군에서 모금한 전액을 사립학교 기금으로 충당하겠소.”그러고 나서 탈퇴성명서를 제출해버렸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그는 통곡하면서 울부짖었다. “나라가 망했는데 선비로서 이 세상을 사는 것은 커다란 치욕일 뿐이다.”이후 그는 매일 술에 취해 방랑하다가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일본군에 체포되어 일본으로 압송된 후 다시 부산으로 이송되었다. 부산을 떠나 대구에 도착하자 일본 형사들은 그에게 고문을 가하기 시작했다. 김창숙이 웃으며 말했다.
“너희가 고문을 통해 나에게서 정보를 얻어내려 하느냐? 내가 비록 고문으로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입을 열지 않을 것이다.”그런 다음 김창숙은 붓을 달라 하여 시 한 수를 써주었다.
광복을 도모한 지 십 년에 집도 목숨도 모두 잊었노라 돌무더기처럼 스러진 삶이 백일하에 드러났는데 새삼 야단스럽게 고문한들 무엇하리요.
일본인 고등계 형사는 한시(漢詩)를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한국인에게 그것을 풀이하게 하였다. 그러더니 문득 김창숙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저는 비록 일본인이지만 선생의 큰 뜻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소. 선생은 이미 목숨과 가정을 돌보지 않기로 했으니 실로 고문을 해서 선생의 뜻을 빼앗을 수 없겠습니다. 하지만 조사를 하자면 부득이 고문을 면하기 힘들 것입니다.”이후 그 형사는 김창숙에게 선생이라고 부르며 고문을 완화시켜 주었다. 감옥에 있으면서 예심이 끝나자 일본인 판사가 김창숙을 보고 말했다.
“내가 독립운동가들을 많이 다루었지만 선생처럼 굳세고 의연한 사람을 보지 못했소. 개인적으로 만나 조용히 시국에 대해 논할 수 있겠소?”그러자 김창숙이 말했다.“이미 재판에서 모두 진술했는데 다시 이야기할 게 뭐가 있겠소.”재심이 시작되자 가족들이 면회를 와 변호사 선임을 의논하였다. 그러나 그는 변호사 선임을 거절하였다. 그러자 변호사 김완섭이 세 번이나 찾아와 면회를 요청하였다. 부득이 그를 만나자 변호사가 물었다.
“변호사를 거절하는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내가 변호사를 거절하는 것은 일본의 법률을 부인하기 때문이오. 일본 법률을 부인하면서 일본 법률을 배운 변호사에게 변호를 부탁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오. 나는 단지 포로일 뿐이오. 전쟁에서 붙잡힌 포로가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는 것은 치욕이오. 남의 손에 의지하여 목숨을 구하지는 않겠소. 나는 이미 생사를 염두에 두지 않고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소. 내 말을 다 했으니 어서 돌아가시오.”
결국 그는 14년형을 언도 받았다. 감옥에 있을 때 교도관이 나타나면 담당 간수는 물론 죄수들까지 모두 일어나 인사를 해야 했다. 그러나 김창숙은 꿈쩍도 하지 않고 태연히 앉아 있었다. 이일로 교도관이 간수를 꾸짖었다. 그러자 간수는 김창숙에게 다가와 부탁하듯 말했다.
“죄수가 교도관에게 인사하는 것은 예의입니다. 앞으로는 다른 사람들처럼 해주십시오.” 그러자 김창숙이 웃으면서 말했다.“내가 감옥에 들어온 지 7년이 지났지만 교도관을 보고 머리 한번 숙여본 일이 없다. 나는 위협한다고 해서 굽힐 사람이 아니니 그리 알라.”
하루는 교도관이 간수를 보내 육당 최남선이 쓴 글을 가져와 감상문을 써내도록 하였다. 그러자 김창숙은 이를 거절하며 말했다. “쓰고 싶지 않다. 그 글에 대한 감상은 이미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다 말했다. 내 감상을 알고 싶으면 사람들을 불러 물어보라.”
그래도 간수가 몇 차례나 찾아와 부탁하므로 김창숙은 양근환이 친일파 민원식을 찔러 죽인 사실을 적은 한시를 지어주었다. 간수가 깜짝 놀라 물었다. “이런 글을 쓰시면 어떻게 석방이 되겠습니까? 새로 순한 말로 써 주십시오. 무엇 때문에 화를 자초하십니까?”“나를 염려해주는 것은 고마우나 나는 화를 겁내는 사람이 아니다.” 간수는 몇 번이나 간청하였지만 김창숙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간수는 그 시를 수첩에 베껴 가져갔다.
해방 후 그가 이승만을 만났을 때였다. 이승만이 그에게 말했다.“지금 나라를 다시 세우는 데 필요한 것은 재정이오. 당신은 자금을 동원할 수 있겠습니까?” 그때 김창숙은 이렇게 말했다.“나는 본래 가난한 사람이라 그럴 능력이 없소.” “유력한 사람들을 모을 수는 있지 않겠소?” “지금 시급한 것은 민족을 단결시키는 일이지 돈을 모으는 것이 아닙니다.”
김창숙(金昌淑) 1879년(고종 16) ~ 1962년.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자는 문좌(文佐). 호는 심산(心山)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상경하여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疎)’를 올리고 이완용 등 오적을 성토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의 유림을 규합해 진정서를 작성하고 중국 상해로 망명한 뒤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우편으로 제출하였다. 1924년 만주와 몽고 접경지대에 황무지를 개간해 독립운동기지 건설계획을 추진하였으나 자금조달문제로 국내에 잠입하여 모금운동을 전개하다가 탄로나 다시 출국하였다. 이후 신채호 등과〈천고(天鼓)〉를 발행하고, 박은식(朴殷植)등과〈사민일보(四民日報)〉도 발간하였다. 또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해 군사선전위원장으로 활약했으며, 1925년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27년 상해에서 일본 영사관원에게 붙잡혀 본국으로 압송되어 14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고문에 의한 두 다리 마비로 형 집행정지를 받아 출옥하였다. 출옥 뒤에도 창씨개명에 반대하는 등 항일 자세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광복이후 유교이념에 입각한 성균관대학을 설립하고, 김구와 함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였으며, 이승만 정권 때는 독재와 부패를 막기 위한 투쟁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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