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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정신 116] 나라 없는 놈이 어떻게 천당에 가!


리효종 기자 / jun28258@gmail.com입력 : 2008년 10월 11일




그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열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장사꾼들을 따라다니며 유기장사를 했다. 그 후 자립하여 큰 상점과 공장을 경영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도산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깨달은 바가 있어 오산학교를 설립하고 교육운동과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105인 사건"으로 투옥되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감옥이란 참 이상한 곳이야. 강철같이 굳어서 나오는 사람도 있고, 썩은 겨릅대같이 흩어져서 나오는 사람이 있거든."

감옥은 그를 강철처럼 단련시킨 시련의 장소이자 훈련의 장소였다. 오산학교를 설립한 후 그는 아침저녁으로 학생들과 함께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그는 학교의 설립자였지만 교장도 아니고 교사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는 늦은 나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교사들에게 직접 배우고, 학생들과 더불어 교정을 청소했다.

그는 오산학교를 개교한 이래 교육만이 구국의 길이라는 신념에서 한 번도 벗어나지 않았다. 집과 땅을 비롯해 자신이 갖고 있던 모든 것을 내놓았다. 그는 선생들에게 굶어서는 안 된다며 자기 집 쌀독에서 쌀을 퍼다 주었고, 비가 와 학교 지붕이 새면 자기 집 지붕에 있는 기와를 벗겨 대신 얹어주었다.

학교 경영이 점점 어려워져 얼마 남지 않은 땅을 팔고 남은 집마저 팔려고 했을 때 가족들의 불평이 심하였다. 그러자 이승훈은 가족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다 팔아서 학교에 주고 우리는 학교 옆에서 학생들에게 밥을 지어주면서 살면 되지 않소!"

하루는 이승훈이 밖에서 돌아와 혼자 학교를 돌보았는데 변소가 너무나 지저분했다. 그때는 추운 겨울이라 재래식 변기 위로 한 무더기의 대변이 얼어붙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보자 이승훈은 도끼를 들고 변소 아래로 내려가 그것을 부수기 시작했다. 기숙사 학생들이 그 모습을 보고 달려와 도끼를 빼앗았다.

그때 한 장로가 얼굴에 오물이 묻어 있는 이승훈을 보고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

"선생님, 좋은 것을 잡수셨군요." 그러자 이승훈이 대답했다."아무 거라도 먹으면 좋은 거지."

3․1운동을 계획하고 있을 때 이승훈은 독립선언서에 기독교 대표로 서명할 사람들을 물색했는데 몇몇 사람이 종교인으로서 서명하기 힘들다고 난색을 표명했다. 그러자 이승훈이 책상을 치면서 외쳤다.

"나라 없는 놈이 어떻게 천당에 가! 이 백성이 모두 지옥에 있는데 당신들만 천당에서 내려다보면서 거기 앉아 있겠다는 게야?"

3월1일을 나흘 앞두고 정동교회에 기독교 대표들이 모였다. 그런데 이승훈이 들어와 보니 사람들이 선언서에 서명할 순서 때문에 다투고 있었다. 이에 이승훈이 사람들을 헤치고 나서며 소리쳤다.

"순서가 무슨 순서야! 이거, 죽는 순서야! 죽는 순서! 누굴 먼저 쓰면 어때! 손병희를 먼저 써!"일순 사람들은 침묵을 지켰다. 그가 임종할 무렵, 이승훈은 친구를 불러 이런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은 뒤에 시체는 땅에 묻지 말고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인체 표본을 만들어 학교에 걸도록 하게.

그의 장례식은 평생 아끼고 사랑했던 오산학교에서 거행되었다. 그 뒤 대학병원에서 해부를 마치고 표본 제작에 들어가려 했을 때 일본 총독부에서 이를 막았다. 결국 그의 유해는 다시 오산학교로 옮겨져 학교 인근에 묻혔다.

 

이승훈(李昇薰)

1864년(고종 1) ~ 1930년.

본관은 여주(驪州)이며 본명은 인환(寅煥). 호는 남강(南岡)이다. 여섯 살 때부터 3~4년간 서당에서 한문을 익히고 1874년 유기상(鍮器商)인 임권일 상점(林權逸 商店)의 사환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성실성을 인정받아 본격적으로 상인의 길로 들어서 민족기업가로 성장했다.

1907년 7월 평양에서 안창호의 강연을 듣고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담한 후 강명의숙(講明義塾)을 설립하고, 11월 24일 오산학교(五山學校)를 개교하여 교장이 되었다. 1911년 2월 안악사건(安岳事件)에 연루되어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였으며, 그해 ??105인 사건??이 일어나자 서울로 압송되어 징역 10년을 선고받은 후 1915년 가출옥하였다.

3․1운동 때 기독교 측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가하고, 곧 구속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22년 가출옥하여 오산학교로 돌아왔다. 1924년 동아일보사 사장에 취임하여 1년 동안 경영하였는데, 이때 물산장려운동 등에 가담하였다. 그후 다시 오산학교로 돌아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105인 사건

1910년 평북 선천(宣川)에서 안명근(安明根)이 데라우치 마시타케(寺內正毅) 총독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한 사건이 벌어지자 일본 경찰은 이 사건을 계기로 신민회 회원과 평안도 일대의 민족적 기독교 신자들을 검거하였다. 이 때 이승훈 등 6백여 명이 체포되었다.

그러나 총독암살음모에 대한 증거가 나타나지 않자 일본 경찰은 혹독한 고문을 자행하고, 대표적인 인물 105명을 기소하였다. 1심에서 유죄선고를 받은 105명은 상고를 제기하여 2심에서 99명이 무죄 석방되고 윤치호, 양기탁, 이승훈 등 6명이 주모자로 몰려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리효종 기자 / jun28258@gmail.com입력 : 2008년 10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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