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구’대감은 광해조10년(1618) 영평판관(永平判官:포천과 영평을 함께 다스리는 원님)이었다. 판관 당시, 백사(白沙)가 유배지 북관에서 타계하시자, 포천에 모시고 장사지낸 인물이며 광해군10년(1618년) 재임중, 군내면 ‘반월산성’을 보수하고, 광해군12년 조정의 반대파들에게 탄핵을 당하고 극렬히 반대하였던 ‘화산서원’건립을 끝내 완성한 인물이다.
이 ‘반월 산성’의 보수와, ‘화산 서원’건립을 반대한 대산의 탄핵으로 끝내 판관(영평·포천)직에서 파직되는 수모를 당하였으나 포천사랑의 판관으로 포천 역사상 기록되어야할 인물이다. 이성구 대감의 자는 자익(子翼), 호는 분사(汾沙), 본관은 전주, 유명한 증 영의정 이수광(李?光)의 아들이다. 선조36년(1603년) 진사시, 광해원년 별시 문과4등으로 한원(翰苑)에 들어갔다.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6조좌랑(6조의 인재등용 최초 기안자), 정랑, 홍문관 교리등 문관으로는 임금에게 사랑과 인정을 받는(노른자위) 요직을 거쳤다. 이성구님이 ‘사헌부 헌납’ 부 수광이‘대사언’ 동생 민구는 홍문관에 재직하였으므로 일가 3사(三司)를 맡게 되었다고 칭찬과 놀랍다고들 하였다 한다. (이렇듯 명문가 명문문인의 가문이다)
인조반정 이후, 대사간, 병조판서로 왕을 남한산성에 모실 때 까지, 대사헌, 경기관찰사, 이조판서를 역임하면서 임금의 총애를 받았으며 인조15년(1637년) 사은사(謝恩使)로서 회은군 덕인과 함께 청의 조정 심양에 가서 우리 조정이 명나라를 칠 원군을 보낼 수 없다는 뜻을 전하는 어려운 일을 완수하였으며 병자난 후, 왕세자가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끌려 갈 때, 우의정에서 좌의정이 되어 어려운 임무를 수행한 외교관이었으며 유공정승이었다.
심양에서 돌아 와 영돈령부사에 임명되었고 재차 사신으로 심양 땅에 다녀와서 인조19년 영의정이 되었으나 승지 홍무적 등, 모함하는 자가 많았으므로 병을 핑계삼아 사직하였다. 이토록 인조임금의 총애를 받았다. 다시, 영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그 해에 선천부사 ‘이계’와 ‘도신(道臣) 구봉서(具鳳瑞)’의 청나라에 대한 기밀누설 사건을 논하다가 파면되여 양화강변(楊花江邊) 면휴암(眠休?)에서 여생을 보냈으며 인조21년(1643년) 타계하였다. 시호는‘정숙(貞肅)이다. 저서로는 ’분사집(汾沙潗)‘을 남겼다.
이성구님은 다른 판관이나 현감, 현령보다도 포천을 다른 유명한 고을의 반렬에 올려 놓으려고 무진 애를 쓰셨던 큰 인물이아. ‘백사 이항복’과 같은 나라의 큰 인물의 묘소를 모시는 대사를 이룩하고 ‘화산 서원’을 완성함으로써 우리‘포천고을’의 격(格)이 격상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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