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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선비정신115] 밥 먹는 것도, 잠자는 것도 독립을 위하여


리효종 기자 / jun28258@gmail.com입력 : 2008년 10월 01일


안창호는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서당에 다니며 공부한 것이 전부였다. 소년시절 서재필이 미국에서 돌아와 만민공동회를 창설하자 안창호도 여기에 참가하면서 조국의 독립과 계몽교육에 대해 많은 것을 깨우치게 되었다.

 

당시 그는 부인과 약혼하였는데 교육만이 독립의 길이라 생각하여 혼인까지 미루며 미국으로 향했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길에서 한국인 두 사람이 상투를 틀어쥐고 싸우는 장면을 목격했다. 알고 보니 중국인들을 상대로 인삼을 파는 한국인들이었는데 서로 판매구역을 침범했다는 이유로 대낮에 싸움질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안창호는 동포들을 한데 모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하여 스물 두 살의 안창호는 뜻이 맞는 세 명의 친구와 함께 빗자루를 들고 한국인을 찾아다니며 일일이 집 안을 청소해주기 시작했다. 처음엔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던 동포들도 하나둘 그들을 환영하기 시작했다.
안창호가 토목공사 인부로 일하는 동안 부인은 삯빨래로 연명하며 아이들을 키웠다. 부부가 저축한 돈이 천 달러쯤 되었을 때 친구 이 갑으로부터 불행한 소식을 들었다. 이 갑은 독립비밀결사인 신민회를 함께 창설한 친구이자 동지였다.

 

이 갑이 러시아에서 엄지손가락이 마비되었는데 뉴욕으로 돌아오다가 전신불수로 변하여 입국을 거절당했을 뿐만 아니라 다시 시베리아로 돌아가 병으로 누워 있다는 것이었다. 안창호는 그의 부인과 의논하여 그동안 저축해두었던 천 달러를 치료비로 보내주었다.

 

그는 반년동안 캘리포니아에서 토목 인부로 일했고, 그 후 1년 동안 미국인이 경영하는 호텔에서 청소부로 일했다. 안창호가 국민회 회장으로 추대되어 그곳을 떠날 때 호텔주인은 안창호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1년 동안 내 호텔에서 열심히 일해 주었으니 소원이 있으면 말해보시오.”

 

그러자 안창호는 거침없이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있던 자리에 한국인을 썼으면 좋겠습니다.”

 

이후 호텔주인은 그 자리에 계속 한국인만 고용하였다고 한다.
안창호는 미국에서 중국으로 향했다. 그는 상해의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가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얼마동안 지방에 숨어 있다가 서울로 올라가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당시 경성지방법원 검사가 종로경찰서에 갇혀 있던 안창호를 신문하였다.

 

“지금까지의 잘못을 인정하는가?”

 

“나는 잘못한 일이 없다.”

 

“여기서 나가면 무슨 일을 하겠는가?”

 

“무슨 일을 하든 상관할 바가 아니다.”

 

“독립운동을 계속할 것인가?”

 

“그렇다. 나는 밥을 먹는 것도 대한의 독립을 위하여, 잠을 자는 것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서이다. 이것은 내 몸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결국 안창호는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병이 심해져 경성대학병원으로 옮겨졌다가 이듬해 3월 세상을 떠났다. 그이 나이 61세였다.

 

안창호(安昌浩)
1878년(고종 15)~1938년
호는 도산(島山)이다. 18세까지 서당에 다니며 한문을 배웠는데, 이때 필대은(畢大殷)과 알게 되어 민족주의에 눈뜨게 되었다. 이후 언더우드가 경영하는 구세학당(救世學堂)에서 3년 동안 수학하며 서구 문물과 접하게 되었다.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관서지부를 맡게 되었는데, 이때 평양지회 결성식에서 민중의 각성을 촉구하는 연설로 명성을 얻었다. 1898년 이상재(李商在) 등과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개최하였으며, 1899년에는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설립하였다.

 

 1900년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코에서 대한인공립협회(大韓人共立協會)를 설립하였다. 을사조약체결 소식을 듣고 귀국하여 1907년 이 갑(李甲), 신채호 등과 함께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하고,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설립하였다. 1909년에는 김좌진(金佐鎭), 이동녕(李東寧)등과 함께 청년학우회를 조직해 민족계몽운동 및 지도자 양성에 주력하였다.

 

 1913년에는 로스앤젤레스에 흥사단을 창설하고, 3·1독립운동 직후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를 맡았으나 1921년에 사임하였다. 이후 중국과 미국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수 차례 체포되었다. 특히 1937년6월 동우회(同友會) 사건으로 다시 일본경찰에 붙잡혀 감옥에 있다가 12월에 병으로 풀려났으나 이듬해 3월 경성대학부속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신민회(新民會)
1907년을 전후해 일제가 민족계몽운동을 탄압하자 윤치호(尹致昊), 안창호(安昌浩), 장지연(張志淵), 신채호(申采浩), 박은식(朴殷植), 이동휘(李東輝), 이갑(李甲), 이승훈(李昇薰), 이동녕(李東寧), 이회영(李會榮) 등 사회계몽운동가들이 국권회복운동을 위해 비밀리에 조직한 단체이다. 안창호의 발기로 창립된 이 단체의 회원들은 대부분 1896년 결성되어 2년 동안 활동하다 와해된 독립협회(獨立協會)의 청년회원들이었다.

 

신민회는 국권을 회복하여 자유독립국가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결성되었는데 전국에 8백여명의 회원이 있었다. 이들은 교육구국운동을 비롯해 계몽강연 및 출판, 민족산업진흥, 독립군양성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주요 활동가들이 외국으로 망명하거나 만주 독립군 기지로 이주했다. 그러나 1911년 일제가 조작한‘105인 사건’을 계기로 신민회 조직이 드러나고 국내에 남아 있던 세력이 탄압을 받으면서 조직이 와해되었다.
리효종 기자 / jun28258@gmail.com입력 : 2008년 10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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