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세상을 열어 빛이 있으라 했다. 농부는 전등 빛으로 세상을 기르지 않는다. 오로지 햇볕으로 가꾼다. 하늘을 철석같이 믿고 함부로 사람의 이기에 의존하지 않는다. 결코 이 끗을 찾는데 급급해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섣불리 글 쓰는 이는 좋은 낱말을 주어다 강퍅한 마음에 주입식 강요를 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 말의 줄기가 성하여 어느 세월에 열매를 맺겠는가.
이제는 교실이나 강단에서 또는 지면에서 이미 선점해 버린 남의 사상과 이론 가지고는 사람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다. 탐실한 열매와 인간의 씨를 얻으려면 씨를 받아들일 건강한 토양을 우선 보음해야 한다. 암컷이 수컷을 받아들이는 탄력 있고 신명나는 흙을 먼저 만드는 일이다. 그렇다. 농부는 먼저 땅심을 돋아 사기를 높일 줄 안다.
갈대 무성한 울음산 바닥 서너 평을 한 폭으로 그린들, 한 뼘만큼 찍은들, 몇 마디의 언어로 꿴들, 한 컷이 된들, 한 장면이 된들, 어찌 그것만이 예술의 방편이 되겠는가.
작물은 말한다. 서로 다투거나 시기하지 않으며 질투하지도 않는다. 보리밭의 깜부기가 손을 들고 일어서거나 논배미에 피들이 바람과 마빡을 들이대거나 들판의 보릿대나 만경 뜰 볏모가지도 고개를 바짝 쳐들고 핏발을 세우지 않는다.
묵묵히 따가운 햇살로 종아리를 맞으며 알곡이 된다. 어정어정 기웃거려 개미와 베짱이의 살아가는 방식에 간섭하려 들지도 않는다. 제자리에서 제몫을 다할 뿐이다. 악기는 사람이 건드릴 때 소리를 내지만 작물은 하늘에 순종하여 사람의 발자욱 소리를 들으며 때로는 스스로 큰다. 농부는 이러한 양순한 생명을 다스려 그 종자를 보존해 가는 문화의 율사다. 농부는 밀밭을 키워 달과 목화꽃이 노래하게 하였으며 이 세상의 사람과 문화와 평화를 지켰다. 온갖 먹거리를 키워 내어 식품문화를 이루어 내는 운동에도 지대히 가담을 했다.
그렇다면 인간문화의 탑으로 우뚝 선 ‘한가위’는 과연 누구의 작품인가. 그 중심에는 산과 들과 내와 그리고 농부가 있다. 인간의 고향이 청청히 거기에 있다. 인간의 정감이 넘치는 화해와 용서의 통로가 거기에 있으며 하늘에 대한 감사와 조상의 끈끈한 뿌리가 그 곳에 있다.
그러므로 농사는 농부가 자연과 합작하는 위대한 예술작품이다. 리얼리티와 휴머니즘으로 흠뻑 젖은 결국은 사랑의 태에서 씨앗을 탄생시키는 우주의 걸작품이다. 농부는 자연의 순리를 거역하기 이전에 타협하고 착실히 순응한다. 공간의 변명에 앞서 쟁기와 낫을 들어 햇살로 사회의 발등을 찍는다. 농부는 자연과 흙과 시비를 걸어 말하기보다는 먼저 듣는다.
하늘의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침묵으로 화답한다. 때로는 날씨를 예측하는 기상대의 과학보다 체험의 학습으로 습득한 변덕스런 환경을 작물의 성장발육과정에 지혜롭게 적용해 간다. 범람하는 인터넷 정보까지 참조하여 자연과도 냉철한 경쟁을 한다. 그리고는 바람과 빛과 구름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노동의 땀을 노동요(메나리)로 풀어내며 희망한다. 그야말로 위대한 노동의 찬가며 인간의 지고한 향연이다. 농사는 몸과 정신으로 하는 실천예술이다.
그러하다. 영화가 종합예술이라면 농사는 현대사회의 다양한 입장을 포용하는 복합예술이다. 또한 진화해 가는 문화에 디딤돌을 놓는 것이며 다양한 삽질과 사유의 다리가 되어 용광로가 된다. 농부의 물리에는 느리게 사는 지혜와 은근과 끈기가 살아 있다. 농사의 여유는 선택이 아니라 천부의 가치다. 곧 농부는 해를 등에 지고 바람을 다스리고 빗길을 내며 양지와 음지를 다독거려 삼위일체(하늘, 농부, 땅) 합력하여 선(善)을 이루게 함이다.
행여 일을 해도 가난하다 하여 상업예술과 마모니즘(mammonisim)에 빠져서는 안된다. 농사는 결코 드라마가 아니라 농사는 생명의 예술이다. 흙과 바람과 아침으로 사람의 예술을 해야만 한다. 농부는 이 땅의 파수꾼이자 인간예술의 보루다.
그래서 우리는 하늘을 통하여 농부를 만나고 농부를 통하여 하늘을 본다. 이것이 곧 예술의 궁극적 유토피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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