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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의 선비정신] 우리에게 남은 것이 대의밖에 더 있겠는가?


리효종 기자 / jun28258@gmail.com입력 : 2008년 09월 23일



우리에게 남은 것이 대의밖에 더 있겠는가?


성균관을 졸업한 신채호는 황성신문을 거쳐 대한매일신보의 기자가 되었다. 그때 신채호는 유명한 골초였는데, 특히 글을 쓸 때는 언제나 줄담배였다. 당시 정부가 진 빚 1천3백만 원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즐기던 담배마저 끊어 국채보상금으로 일금 2원을 냈다.

 

당시 대한매일신보의 영국인 사장이 그의 재질을 높이 사 미국유학을 권했으나 신채호는 단호히 거절하며 말했다.

 

“뜻은 감사합니다만, 지금 이 판국에 외국 유학은 분에 넘치는 일입니다. 나라가 이 지경인데 저 혼자 공부하겠다고 조국을 떠날 수는 없습니다.”

 

그러자 사장이 설득하고 나섰다.
“공부를 더 하면 장차 이 나라를 위해 더 큰 일을 해나갈 수 있을 거요. 유학비용은 내가 대겠소.”
“저는 이미 이 겨레와 운명을 같이 할 결심을 세웠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중국에 망명하고 있을 때 신채호는 조카 향란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몰래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조카가 수구파의 후손인 홍어길과 결혼한다는 말을 듣고 이를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럼에도 조카는 숙부의 충고를 듣지 않았다. 그러자 신채호는 자신의 손가락 하나를 끊어버리며 말했다.

 

“이제 너는 우리 집안 사람이 아니다.”그러고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다. 이것이 고국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그가 북경에 있을 때 우응규라는 청년이 신채호를 스승으로 모셨다. 그는 끼니를 굶는 스승을 보다못해 몰래 스승이 앉는 자리 밑에 돈을 넣어 두었다. 그러나 신채호는 청소를 전혀 않고 책만 읽으며 사는 터라 돈을 깔고 앉아 있으면서도 밥을 굶었다.

 

어느 날 신채호는 오랜만에 청소를 하다가 요 밑에 깔려있는 돈을 발견했다.
“돈이 떨어진 줄 알았더니 아직도 남아 있었군.”
그러면서 그는 호주머니에 돈을 집어넣곤 했다.

 

임시정부 수립을 논의할 때 신채호는 미국에 들어앉아 강대국에 청원만 하고 다니는 이승만을 행정수반으로 추대하는 것에 격렬히 반대하였다.

 

“미국에 위임통치를 청원한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오.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아직 되찾지도 않은 나라를 팔아먹으려 하질 않소! 그런데도 우리의 대표로 나설 수 있단 말이오?”

 

그는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이때 문을 지키던 젊은이들이 결론을 내야 한다며 앞을 막아섰다. 신채호가 눈을 부릅뜨고 호통쳤다.

 

“우리에게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이냐? 대의(大義)밖에 더 있는가? 민족적 대의가 용납할 수 없다. 차라리 나를 죽여라.”

 

신채호가 일본군에 체포되어 여순 감옥에 있을 때였다. 친지들이 일가 뻘 되는 한 부호를 설득하여 그의 보증아래 신채호를 가출옥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병상에 누워 있던 신채호는 이를 듣고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은 친일파 아닌가? 친일파의 보증을 받고 감옥에서 나가라는 말인가?”

 

결국 그는 여순감옥에서 생을 마쳤다. 그는 평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죽거든 왜놈의 발길에 시체가 차이지 않도록 화장하여 바다에 띄워달라.”
그러나  유해를 고국 땅으로 옮겨야 한다는 주위 사람들의 주장에 따라 그의 시신은 고국으로 돌아왔다.

 

 

신채호(申采浩)
 1880년(고종 17) ~ 1936년.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호는 단재(丹齋)이다. 18세때 전 학부대신 신기선(申箕善)의 배려로 성균관에 입학한 후 유학자인 이남규(李南珪)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26세 되던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의 기자로 활약하며 많은 글을 썼다.
이후 항일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에 참여하고, 안창호 등과 신민회의 방계조직인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를 발기하였다. 1910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이동휘 등과 광복회(光復會)를 조직하고, 1913년 상해로 가서 동제사(同濟社)에 참여하였다.

 

1918년경부터 북경의 보타암(普陀庵)에 우거 하면서 국사 연구를 계속하였다. 1919년 북경에서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하고 단장이 되었으며 그 해 4월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승만 노선에 반대하여 직책을 사임하고, 독립신문의 주필이 되었다.
1928년 4월 무정부주의 동방연맹대회에 참석하여 활동하는 등 행동투쟁에 나섰던 그는 5월 대만에서 외국위체위조사건(外國爲替僞造事件)의 연루자로 체포되어 대련(大連)으로 이송, 1930년 5월 대련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여순 감옥에서 복역하던 중 뇌일혈로 순국하였다.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등 많은 저서를 집필해 우리나라 근대사학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리효종 기자 / jun28258@gmail.com입력 : 2008년 09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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