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화(造化)는 자연(自然)의 영역이고 조화(調和)는 인간(人間)의 영역이다.
우리말에 발음은 같으나 뜻이 다른 것이 많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화합(化合)과 화합(和合)이다. 조화(造化)와 조화(調和)도 그렇다. 발음은 같으나 그 뜻은 다르다. 앞의 조화는 천지조화(天地造化)할 때 말하는 조화이고 뒤의 조화는 균형(均衡)과 조화(調和)라고 할 때 말하는 조화이다. 이때 앞의 조화는‘생겨날 때’말하는 조화이고 뒤의 조화는‘어울릴 때’ 말하는 조화이다.
그리고 조화(造化)는 자연(自然)의 영역이고 조화(調和)는 인간(人間)의 영역이다. 무엇을 생겨나게 하고 변하게 하는 것은 자연이 만들어내는 조화(造化)요, 무엇을 어울리게 하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조화(調和)란 말이다.
화합(化合)과 화합(和合)도 같은 것이다. 앞의 화합은 원소의 화합(化合)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고 뒤의 화합은 건반의 화합(和合)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피아노에서 도 미 솔을 같이 누르면 제 각자의 음을 내면서 화음(和音)을 이룬다. 그런데 원소의 세계에서는 가벼운 기체인 수소, 마시면 상쾌해지는 산소, 그리고 검은 숯에 들어있는 탄소를 조합하면 원래의 성질은 어디로 사라지고 포도주 같은 전혀 다른 물질로 변화(變化)된다. 그래서 원소 세계의 화합은 화합(和合)이 아니라 화합(化合)이다.
화합(化合)은 이처럼 본질이 변하는 것이다. 조화(造化)속에 그 본질이 변하는 것이다. 화(化)는 조(造)와 통한다는 말이다. 자연의 이치(理致)와 자연의 섭리(攝理)에 따라 무언가 새로운 것이 생겨날 때 화(化)와 조(造)가 작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창조(創造)와 창작(創作)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쓰임새는 다르다. 여기서 창조(創造)는 자연이 하는 일을 말하는 것이고 창작(創作)은 인간이 하는 일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창작할 뿐 창조하지는 못한다는 말이다.
나는 강의 첫 시간에 학생들에게 관찰(觀察)과 통찰(洞察)에 대한 의미(meaning)를 각인시킨다. 학문의 시발은 관찰(observation)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공부의 시발은 관찰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관찰은 눈에 보이는 것을 관심을 가지고 보는 것이고 통찰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관심을 가지고 보는 것이다. 관심을 가지고 주변을 둘러보면 자연의 조화(造化)와 자연의 신비(神秘)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조화(造化) 속에 이미 조화(調和)가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좀 더 관심을 가지고 보면 물리(物理)의 세계를 뛰어넘어 화학(化學)의 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다.
화학(化學)에서 말하는 화(化)의 세계와 조화(造化)에서 말하는 조(造)의 세계는 인간의 영역을 벗어나 있는 것이다. 이미 자연이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자연의 조화 속에 만물이 오고가는 것이다. 생멸(生滅)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다만 그 속에서 미(美)를 추구하고 아름다움을 찾을 뿐이다. 물론 그 출발은 용(用)에서 시작된다. 용의 기능(function)을 다하면 미(beauty)로 넘어간다. 용과 아울러 미를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미란 아름다움이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균형(均衡)과 조화(調和)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건반 위에서 이루어지는 화음처럼 조화(harmony)를 이룰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왜 조화(調和)를 찾는가? 아름답기 때문이다. 편안하기 때문이다. 조화를 이룰 때 가장 아름답다고 느끼고 편안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조화란 또 무엇인가? 조화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을 때 그 속에서 조화를 보는 것이고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다. 균형과 조화를 이룰 때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다. 균형이란 정적인 것임과 동시에 기울어짐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조화란 동적인 것임과 동시에 하나를 지향하는 전체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를 지향하는 조화(調和) 속에서 조화(造化)의 모습을 추구하는 것이 인생이고 화(和)의 세계에서 화(化)의 세계로 넘어가는 환멸연기(幻滅緣起)를 추구하는 것이 우리 인류의 꿈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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