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조조‘39년(1606년)∼숙종15년(1689)’포천에서 태어나 살았으며 일동면 화대리 고마동에 묻힌 효자이자 시인이었던‘도해정(蹈海亭)’‘구방준(具邦俊)’님을 만나 보기로 하자.
님의 자는‘석보(碩輔)’이고 호는‘도해정(蹈海亭)’이고 본관은 능성(綾城)이다. 조선시대 학자로 문집인‘도해정집’에 성리학자인 유중교(柳重敎)가‘도해정구선생사실기(蹈海亭具先生事實記)’를 쓰고‘김평묵’선생께서 발문을 지어 게재 할만치 유명한 선비였다.
5세 때, 모친상을 당하고 12세때 충의위(忠義尉)로 봉직 중이던 부친이 간신 이이첨의 무리에게 화를 입어 유배지에서 별세하는 등, 불행한 소년기를 보냈다. 그러나, 형님인 수준(秀俊), 우준(迂俊)과 함께 학문에 힘쓰며 가업(家業)에 종사하였다.
청운(淸雲)의 꿈을 꾸지 않고 일찍이 세상을 떠난 부모님 생각을 하면서 일생을 살았다. 다시, 말해서 벼슬자리에 나아가고자 하지 않고 뜬구름 같은 세상살이를 오직 효도하는 마음으로 늘 살았다고 하는 것이 옳은 말일 것이다. 특히,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천지신명(天地神明)께 기원하였다. 그 소원은 40세 되던 해 이루어진다.
꿈속에서 한 마리의 나비가 날아 와 백발 노인으로 변하여‘내가 너의 자모(慈母)로다’하고 눈물을 흘리며 어루만지자, 서로 부등켜 안고 통곡하다가 깨었다. 이에 꿈속에서 만난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사모곡(思母曲)인‘몽리봉모부(夢裏逢母賦)’를 지었다는 얘기는 유명하다.‘꿈속에서 만나 뵈운 내 어머니의 노래’인 것이다.
‘조실부모(早失父母)’ 하였으나 효성이 지극하여 80평생을 소의(素衣:흰옷)로 살았으며 술과 고기를 먹지 않았다. 인조14년:(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온 가족이 강원도 통천에 피란 하였다. 호란이 끝난 후에도 이곳 통천에 살면서 도해정(蹈海亭)이란 정자를 세우고 후학들에게 ‘성경현전(聖經賢傳 성인들의 경전과 훌륭한 선비들의글)’을 읽는 학풍을 조성하고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한다.
‘구방준’님이 별세 후, 호란 피란지 통천 사람들이 효정(孝旌 효자정문)을 나라에 청원하는(유림들의 청원)바 여러 번 있었으나 은전을 받지는 못했다 한다. 일동면 화대리 고마동에 묻혔다. 표석(비석)에는‘도해정 구선생지묘(蹈海亭具先生之墓)’라 씌였는데 묘지명은 이기홍(李基弘)의 글이다.
우리는 여기 구방준님의 이야기를 하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내 고향 포천에는 예부터 효자도 많고 열녀도 많은 고장이지만 구방준님 같은 효자가 요즈음 얼마나 있을까?
벼슬살이를 쫓아 뜬구름이 되어 떠돌며 가정과 부모님께 효도하지 않는 사람은 없는지? 다같이 나를 돌아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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