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은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는데, 가슴에 검은 점 일곱 개가 있어 어렸을 때 이름을 응칠이라 했다. 1909년10월26일, 조선총독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대장대신과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을 방문했을 때 권총으로 그를 저격하였다. 이토가 총탄을 맞고 쓰러지자 병사들이 달려들어 그 자리에서 안중근을 체포하였다. 그때 안중근은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도망갈 사람인가?”
그는 러시아 재판소에 수감되었다가 여순에 있는 일본 관동법원으로 이감되었다. 당시 일본은 조선의 백성들이 일본과의 합병을 기뻐한다고 세계 각국에 선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법정에서 조선인들의 반발이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리하여 법원장 마나베(眞鎬十藏)는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사카이 기메(境喜明)와 소노키 지로(園木次郞) 등을 감옥으로 보내 안중근을 설득하도록 했다.
“너는 아직도 일본의 원대한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은 조선의 백성들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만일 지금이라도 잘못을 깨닫고 뉘우친다면 일본은 반드시 너를 석방할 것이다.” 그러자 안중근은 웃으며 대답했다.
“죽기 싫은 것은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내가 구차하게 살려 했다면 어찌 여기까지 왔겠는가?” 그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설득하려 했지만 안중근은 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 해 12월, 첫 공판이 열렸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해외에 거주하는 동포들이 많은 돈을 모금하여 보냈다. 가족들은 영국인 더글러스와 러시아인 미하일로프, 그리고 한국인 안병찬을 변호사로 선임했으나 일본 법원은 이들이 일본어를 할 줄 모른다는 이유를 내세워 일본인 미즈노(水野吉太郞)와 가마타(鎌田政治) 등을 관선변호사로 선임했다.
이듬해 정월까지 모두 여섯 차례의 공판이 열렸으나 안중근의 태도는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나는 일본에게 적장(敵將)으로서 사로잡힌 것이다. 그런데도 당신들은 나를 형법상의 범죄자로 취급하고 있으니 이 어찌된 일인가?”
그는 일본의 침략정책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이토 히로부미의 죄를 낱낱이 성토했다. 일본 법원은 사건이 더욱 확대될 것을 꺼려하여 다시 한 번 회유를 시도했다. “너는 곧 사형될 것이다. 하지만 이번 사건이 세계의 정치상황을 잘못 알아 저지른 실수라고 말한다면 살 수 있을 것이다.”
“너희가 나를 죽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내가 단 하루만 살아도 너희 나라에는 하루의 근심이 있을 뿐이다. 진정 누가 옳고 그른지는 천하에 밝혀질 날이 있을 것이다.” 안중근은 끝내 흔들리거나 굴복하지 않았다. 감옥에는 이 사건과 관련하여 여러 동지들이 갇혀 있었다. 그 중에는 더러 비탄에 잠겨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때마다 안중근은 이렇게 말했다.
“대장부가 되어 스스로를 왜 그리 초라하게 만드는가?”
어느 날 안중근의 죽음을 예감한 동생 정근(定根)과 공근(恭根)이 찾아와 말했다. “다음에 면회 올 때는 형수님과 조카들을 데리고 오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안중근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구차하게 어찌 처자식에게 미련을 두겠는가?”
마침내 안중근에게 사형이 언도되었다. 형을 선고받은 뒤 그는 두 동생에게 말했다. “나는 죽어도 일본이 통치하는 땅에는 묻히지 않겠다. 그러니 하얼빈 공원 옆에 묻었다가 나라가 해방되기를 기다리도록 하라.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이윽고 3월26일, 안중근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당시 그의 나이 32세로 아들 둘이 있었다. 그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일본 법정은 그의 시신을 감옥 안에 매장했다.
그는 감옥에 갇혀 있던 2백여 일 동안 평소와 다름없이 먹고 마셨으며, 밤마다 코를 골며 날이 밝을 때까지 태평하게 잠을 잤다.
처형되던 날, 그는 한복으로 갈아입고 웃으면서 처형장으로 향했다. 그의 재판을 지켜보았던 영국인 더글러스는 그가 처형된 후 이렇게 말했다.
“내가 법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보았지만 안중근 같은 사람은 일찍이 만나본 적이 없소. 돌아가면 마땅히 그의 이름을 세상에 기리겠소.”
안중근(安重根) 1879년(고종 16)~ 1910년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어려서는 응칠(應七)로 불렀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해외 망명을 결심하고 상해에 잠시 머물다 이듬해 귀국했다. 1906년 석탄상회를 경영하다가 정리한 뒤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설립하고, 곧이어 남포(南浦)의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하여 학교경영에 전념하였다.
1907년 북간도로 망명한 뒤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청년회에서 일하며 이범윤(李範允) 등 독립운동가들을 만나 의병을 조직하고 대한의군 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무장투쟁을 벌이다 탈출한 뒤 흑룡강 상류를 오가며 이상설(李相卨), 이범석(李範奭) 등 애국지사를 만났다.
1909년 열두 명의 동지가 모여 단지회(斷指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한 후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李完用)의 암살을 계획하였다. 마침 그 해 9월,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의 코코프체프 대신과 회동하기 위해 하얼빈에 온다는 것을 알고 우덕순(禹德淳), 조도선(曺道先), 유동하(劉東夏) 등과 저격계획을 세웠다. 1909년10월26일, 하얼빈에서 이토를 향해 권총을 발사하여 세 발을 명중시켰다. 그곳에서 체포되어 관동지방법원에서 여섯 차례의 재판을 받았는데, 재판과정에서 그의 태도는 일본인 재판장과 검찰관들도 내심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1910년2월14일 오전 10시30분에 사형을 언도 받고 3월26일 오전 10시 여순(旅順)감옥 형장에서 순국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