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전반에 미국을 휩쓴 매카시즘(McCarthyism)은 일련의 반(反)공산주의 선풍이었다. 할리우드에 대한 마녀사냥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매카시즘의 광기는 브로드웨이에서 경험했던 것 보다 훨씬 심각한 것이었다. 공산당원 이었거나 친 공산주의사상을 퍼뜨린다고 생각되는 모든 영화 관련 인들을 색출해서 강도 높은 조사를 실시했는데 많은 영화인들은 감옥 아닌 감옥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많은 영화 스튜디오들은 의심을 받은 배우나 감독, 스탭들을 쓰기 꺼려했고 이런 현상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극우파의 매카시는 미국 내의 분위기를 보수 성향으로 몰아가며 좌익성향을 띄거나 극도로 진보적인 지식인과 예술가들을 할리우드에서 축출했다.
그 결과 영화의 제작편수가 현저히 감소되고 더욱이 텔레비전 보급으로 영화관객이 감소하면서 뮤지컬 시장에 공황을 가져왔다. 텔레비전에서 뮤지컬을 방영하면서 뮤지컬 영화시장은 마침내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 영향은 오늘날에 이르기 까지 지속되고 있다. 그 와중에서도 할리우드는 뮤지컬 영화사상 최고의 명작들이 발표되었는데 뮤지컬 영화의 새로운 경향도 생겨났다. 1950년대 할리우드의 뮤지컬은 다음의 네 가지 경향을 보인다.
첫째, 1940년대부터 인기를 얻었던 스위밍 뮤지컬들(Swimming Musical). 미국 수영선수 출신인 에스더 윌리엄스(Esther Williams)를 기용해 만든 뮤지컬로 모든 장면들이 수영장 물속에서 촬영되었고 1950년대 까지도 큰 인기를 끌었다. 최근 올림픽에서도 볼 수 있는 싱크로나이즈 수영과 수중 발레는 당시에 이미 영화를 통해 시작되었는데 물속에서 완벽하게 안무화된 코러스 걸들을 출연시켜 새로운 뮤지컬의 경향을 보여주었다. 40년대 개봉된 <목욕하는 미인(Bathing Beauty, 1944)>을 시작으로 <백만 달러 인어(Million Dollar Mermaid, 1952)> 등에서 선보인 물속발레 장면들은 촬영기술의 발달과 함께 관객들에게 새로운 뮤지컬의 즐거움을 제공해 주었다.
둘째, 브로드웨이에서 성공한 뮤지컬의 영화화. 리처드 로저스(Richard Rodgers)와 오스카 해머스타인 2세(Oscar Hammerstein II)의 브로드웨이 히트작인 <오클라호마(Oklahoma, 1955)>, <왕과 나(King & I, 1956)>, <남태평양(South Pacific, 1958)> 등이 영화로 만들어져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리메이크 버전 <쇼 보트(Show Boat, 1951)>가 다시 한 번 뮤지컬로 제작되었다.
셋째, 오리지널 영화버전 뮤지컬들. 뮤지컬 영화의 최고로 손꼽히는 <파리의 아메리카인(American in Paris, 1951)>, <사랑은 비를 타고(Singin" in the Rain, 1952> 등이 제작되었고 1937년에 만들어진 영화를 뮤지컬로 리메이크한 <스타탄생(A Star is Born, 1954)>과 <7인의 신부(Seven Brides for Seven Brothers, 1954)>, 그리고 <화니 페이스(Funny Face, 1957)>, <지지(Gi Gi, 1958)> 등 명작들이 이 시기에 쏟아져 나왔다.
넷째, “로큰 롤의 제왕(The King of Rock "n" Roll)”으로 일컬어지는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1935~1977)의 영화들. <러브 미 텐더(Love Me Tender, 1956)>, <러빙 유(Loving You, 1957)>, <제일 하우스 록(Jail House Rock, 1957)> 등이 영화로 만들어져 인기를 얻었고 곧바로 음반도 세계적으로 밀리언셀러가 되었다.
외국뿐만 아니라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가수로 출발해서 인기를 얻을 후 영화나 TV 등으로 옮겨 겸업을 하는 연예인들이 많아졌다. 가수로 성공한 아이돌 스타들을 연예계로 끌어들이는 것은 요즘의 분위기에서는 어쩌면 당연한 수순으로 보여 지는데 1950년대 엘비스가 그 원조라고 할 수 있다. 섹시하고 특이한 외모로 청춘의 우상으로 자리매김하며 로큰롤의 황제에 오른 엘비스를 영화사들이 그냥 놔둘 리가 없었다. 특히 뮤지컬 시장을 MGM에게 빼앗겼던 20세기 폭스 영화사나 파라마운트 영화사가 시장점유를 위해 엘비스와 계약을 체결한 후 영화를 마구잡이로 찍어냈다.
그 결과 엘비스와 그의 영화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영화를 위해 작곡한 음악들도 대중적인 인기를 얻으며 엄청난 음반판매고를 기록했다. 어느 청춘스타들도 엘비스만큼의 성공을 구가하지는 못했다. 엘비스는 1960년대까지 무려 31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특히 전성기에는 자동화된 공장에서 제품을 찍어내듯이 영화를 한꺼번에 몰아서 찍기도 했다. 당연히 완성도가 떨어지는 영화들이 많았는데 관객들은 개의치 않고 극장으로 몰려들었으며 스크린에서 엘비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열광했다.
특히 10대들이 관객의 주류를 이루었는데 영화의 새로운 관객층을 개척한 공로와 함께 오늘날 까지도 유효한 하이 틴 시장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영화들은 1960년대까지도 지속되었다. 그 성공의 요인으로는 영화의 히트와 싱글앨범의 히트가 동시에 이루어졌기 때문인데 엘비스는 영화와 음악의 공존이 가능함을 입증시켜 주었다.
1950년대 이후부터 뮤지컬 시장은 쇠퇴하기 시작했는데 그 정점에서 뮤지컬 역사상 최고의 명작들이 나온 것은 다행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대부분의 50년대 뮤지컬 영화들은 국내에서도 쉽게 감상할 수가 있는데 스위밍 뮤지컬들을 아직 국내에 출시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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