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 유창(兪) 조선 효종조 6년(1655년) 효종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서 직접 무재(武才)를 보아서 장원을 뽑았는데 유창(兪)이 사복시정(司僕寺正)으로 있는 문신임에도 불구하고 장원(壯元)으로 뽑혀 말을 하사 받는 영광을 차지하였다. 같은 달에 일본으로 사신(使臣)으로 보내게 되었는데 조형(趙珩)과 함께 부사 뽑히어 일본으로 갔다. 일본에 조선통신사를 가게 되자 효종 임금께서는 유창님의 가족에게 유사를 시켜 부모님과 가족에게 하사하는 특별한 늠료(凜料)와 약물을 유사를 시켜 보냈다. 유창통신사 가족을 아끼고 위로하는 효종 임금의 배려였다. 효종 7년(1656년) 2월 일본으로부터 통신사 일행이 돌아오자 보고를 받은 효종임금은 노고를 치하하는 뜻에서 일행 모두를 가자(加資:벼슬과 지위를 한 등급 높여줌)하였다. 조선통신사 유창은 조선시대 문인으로 일동면 유동리 사람으로 이 곳에 묻혔다. 자는 백규(伯圭), 호는 추담(楸潭) 운계(雲溪), 본관은 창원, 첨중추부사, 필의(必毅)의 종손, 첨중추부사 용(溶)의 손, 첨정(僉正) 여해(汝楷)의 자 이다. 1635년(인조13) 생원 시에 급제, 1650년(효종1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승정원 주서가 되었다. 효종4년(1653년) 칠월칠석날, 옥당에서 한림주서(翰林注書)등을 모아 놓고 춘방작률(春坊作律)하게 되었는데 주서로 있던 유창이 장원을 하여 효종임금께 상을 받았다. 효종 7년(1656년) 일본 통신부사로 공을 세우고 귀국하여 그 공로로 가자되어 5월에 승정원 승지로 특별히 제수 받았으며, 그 후, 충정감사, 우부승지, 강원감사, 예조참의, 좌부승지, 광주록사 등을 역임하였다. 현종15년(1674년) 3월 왕비상을 당하여 중국(명나라)에 고부(告訃)하기 위하여 고부사(告訃使)로 임명되어 연경을 다녀왔다. 그 후, 예조참의, 개성부유수, 승지 등을 역임하고 개성 부유수(開城府留守)를 끝으로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일동면 유동리에서 여생을 보냈다. 이때에 아호(雅號)를 추담(楸潭)이라 하였다. 지금도 그 때에 새겨지 곡구정(谷口亭) 이란 세 글자가 동네 바위벽에 남아 있다. 숙종 16년(1690년)9월 병으로 타계하니 춘추 77세였다. 저서에는 추담집(楸潭集)이 있다. 평소 유창님은 평소 성품이 고요하고 겸손한 참 선비였으며 누구보다도 내고향 포천을 사랑한 외교관이었으며 문인이었다. 추담집을 국역하여 포천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읽게 하는 것도 포천인들이 해야 할 일이다. 근래(최근) 포천출신 외교관으로는 호주 대사를 끝으로 외교관 생활 38년을 마감한 송영식대사가 있다. 조선통신사 유창 님의 후예다운 분이 아닌가(?)생각되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