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배우가 죽기 전까지 그것도 동일한 배역으로 무대에 4,000번 이상 출연할 수 있을까? 연기 인생을 통틀어서 4,000번의 공연을 매일같이 하려면 약 11년이 걸려야 해낼 수 있는 기록인데 율 브리너(Yul Brynner)는 <왕과 나(The King and I)>라는 작품으로 4,525회라는 놀라운 공연기록을 세웠다. 12년 하고도 약 4개월에 걸쳐 출연한 대기록이다. 물론 1951년부터 1985년까지 34년 동안의 기록이다. 러시아 태생의 배우 율 브리너는 1950년대와 1960년대를 풍미한 연기파 배우였다. 깊고 풍부한 목소리에 삭발한 머리가 트레이드마크인 율 브리너는 비록 <왕과 나(The King and I, 1956)> <십계(The Ten Commandments, 1956)> 그리고 <황야의 7인(The Magnificent Seven, 1960)> 등의 영화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그의 배우로서의 활동영역은 바로 브로드웨이였다. 그의 출세작이며 동시에 대표작이기도 한 뮤지컬 <왕과 나(The King and I)>는 율 브리너라는 배우를 세상에 알려준 작품이었다. 그는 1985년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죽는 순간까지 <왕과 나>의 국왕 몽쿠트 역으로 출연하여 이 작품에 끊임없는 애정을 보였다. 1951년 <왕과 나(The King and I)>의 첫 공연을 시작으로 1985년 리바이벌 공연 까지 율 브리너는 4525회라는 전무후무한 경이적인 출연횟수를 기록했고 그로인해 토니상 시상식에서 특별공로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50년대 브로드웨이의 호황을 주도한 <아가씨와 건달들(Guys and Dolls)>이 대성공을 거두었다. 1951년에도 연일 매진을 기록하며 장기공연에 돌입하고 있을 때 브로드웨이의 한 극장에서는 또 다른 명작의 막이 올랐다. <왕과 나(The King and I)>는 리처드 로저스(Richard Rodgers)와 오스카 해머스타인 2세(Oscar Hammerstein II) 콤비의 여섯 번째 작품인데 1951년 3월에 초연되었을 때 율 브리너는 거의 무명의 배우로 파격적인 캐스팅이었다. 안나(Anna) 역을 맡은 여배우 거투르드 로렌스(Gertrude Lawrence)는 이미 잘 알려진 유명한 여배우여서 상대배우로서의 율 브리너의 기용은 당혹감마저 들게 했다. 원로격인 관록 있는 여배우와 신인 배우와의 무게감은 처음부터 무대에서는 상대가 되지 못할 듯 했다. 하지만 공연이 시작되면서 율 브리너의 천재성이 발휘되기 시작했고 그가 맡은 샴의 왕 몽쿠트(King Mongkut of Siam) 역은 이후 율 브리너 이외의 배우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강렬하고도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었다. 로렌스와 브리너의 콤비로 초연은 성공리에 끝을 맺었고 1,246회라는 공연기록을 세웠다. 다음 해에 토니상 수상식에서 <왕과 나>는 최우수 작품상을 포함해 5개의 상을 거머쥐었다. 율 브리너는 아쉽게도 남우조연상(Best Featured Actor)을 수상했는데 그가 신인이었던 관계로 그의 이름이 공연 타이틀 밑에 기록되어 있어 조연상에 만족해야 했다.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로렌스는 공연의 막이 오른 후 같은 해 5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우연의 일치로 율 브리너도 1985년 브로드웨이 버전 <왕과 나>를 끝으로 생을 마감하여 팬들에게 안타까움을 주었다. <왕과 나>는 마가렛 랜든(Margaret Landon)의 <안나와 샴의 왕(Anna and the King of Siam)>을 토대로 한 뮤지컬이다. 1860년대 초 태국을 무대로 한 이 이야기는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기초로 만들어졌는지 확인되지 않았지만 태국에서는 샴 국왕에 대한 정확하지 못한 역사성에 기초한다고 해서 공연이 금지되기도 했다. 작품 속에 나오는 국왕 몽쿠트는 태국 차크리 왕조(Chakkri dynasty, 타이 가문)의 넷째 왕으로 일찍부터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개혁을 수행한 국왕이었다. 젊은 미망인 안나는 샴 왕의 초청을 받고 아들 루이와 함께 왕실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방콕에 도착한다. 처음 왕의 무례한 태도에 실망하여 영국으로 돌아가려던 안나는 몽쿠트 왕의 자녀들을 보고 샴에 눌러 앉아 그들을 가르치기로 결심한다. 안나는 가끔씩 문화적인 습관의 차이와 왕의 자기중심적인 태도로 인해 왕과 충돌을 일으키지만 한편으론 왕의 인간적인 면도 발견하고 샴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하는 왕에게 묘한 애정도 느끼게 된다. 한편, 샴의 왕을 야만인이라고 모함하는 말이 영국여왕의 귀에 들어가자 샴 왕은 심각한 고민에 빠진다. 이에 안나는 영국대사에게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왕이 야만인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자고 제안한다. 안나의 주도하에 만찬은 성대하게 치러지고 만찬의 하이라이트인 연극은 왕에게 조공으로 바쳐진 링버마의 공주 텁팀에 의해 만들어져 모두에게 감동을 안겨준다. 하지만 텁팀은 자신을 수행하고 온 사신과 사랑하는 사이다. 안나의 도움으로 연회 때 엉클 톰스 캐빈을 각색한 텁팀은 자신의 처지를 빗대어 왕에게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하지만 왕은 노예를 쫓던 왕의 죽음을 찬미하는 대목에서 크게 분노한다. 얼마 후 텁팀이 그녀의 남자와 도망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왕은 안나와 크게 언쟁을 벌이고 화가 난 안나는 영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왕이 병에 걸려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안나는 왕과 화해하고 계속 샴에 머무르며 황태자를 돕겠다고 약속한다. 왕은 황태자의 신년계획을 들으며 조용히 눈을 감는다. 뮤지컬 <왕과 나>는 1956년에 영화로 만들어졌다. 율 브린너가 무대에서처럼 몽쿠트 왕 역을 맡아 안나 역의 데보라 커 (Deborah Kerr)와 열연했는데 전 세계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 영화로 율 브리너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뮤지컬 <왕과 나>는 1999년에 주윤발과 조디 포스터가 콤비를 이룬 <애나 앤드 킹 (Anna And The King)>으로 리메이크 되었다. 두 영화 모두 DVD로 감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