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은 삼학사(三學士) 중 한 사람인 윤집의 손자다. 윤홍은 평소 할아버지의 원수를 갚지 못하는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당시 그의 고모는 홍문관 교리 윤석(尹晳)과 혼인하였는데, 고모가 아버지의 비석에 기록할 묘문(墓文)을 최명길의 손자인 최석정(崔錫鼎)에게 부탁하려 하였다. 그러자 윤홍은 고모를 찾아가 말했다. “최명길이 할아버지를 잡아다 청나라에 바쳤고, 아울러 오달제와 홍익한 선생도 죽음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원수의 자손에게 문장을 받아다가 어찌 아버님의 묘비에 새길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곧 최석정에게 편지를 보내 절교하였다. 경종이 병이 들었으나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그리하여 김창집, 이건명 등 노론 4대신이 영조를 즉위시키려 하였다. 이때 최석정은 무옥(誣獄)을 일으켜 4대신을 죽인 후 경종을 모시고 결사의 맹세를 하려 하였다. 그러자 윤홍은 이를 반대하여 최석정에게 말했다. “나는 충신을 죽이는 회맹에 참여할 수 없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나라의 녹을 먹는 신하다. 지금 칼을 물고 임금 앞에 엎어지지 못한 것은 임금께서 깨달으시길 바랐기 때문이다. 내가 무슨 면목으로 갓끈을 날리며 역적들과 더불어 피를 삼키며 맹세할 수 있으랴!” 그때 외조카인 조태억(趙泰億)이 그를 염려하여 만류하였다. “만약 저들의 뜻을 거스르면 큰 화를 당할 것입니다. 외삼촌의 연세가 벌써 70인데 어찌 지난날 가졌던 원한 때문에 저자에서 죽음을 당하시려고 합니까?” 그러자 윤홍이 웃으며 답하였다. “나는 젊어서 나라의 은총을 받았고 이제 곧 늙어 죽을 것이네. 나라를 위해 한 번 죽는데 무슨 미련이 있겠나?” “옛날의 군자도 부득이한 경우에는 한 번쯤 의롭지 못한 일에 참여하였습니다. 죽음을 받느니 차라리 저들과 뜻을 함께 하여 영화로움을 취하는 것만 못합니다.” 그 말에 윤홍이 버럭 화를 내며 꾸짖었다. “자네가 하찮은 이익 때문에 나를 가르치려 드는가!” 그러고는 질끈 눈을 감고 대꾸하지 않았다. 윤홍의 사위까지 편지를 써서 회맹에 참여하라고 권하였으나 그는 그 편지마저 찢어버렸다. 이로 인해 그는 2년간 귀양살이를 해야 했다. 영조가 즉위한 뒤에야 그는 귀양에서 돌아왔다. 그러자 조태억이 한강까지 나와 맞았다. 그러자 윤홍은 조태억을 돌아보고 웃으며 말했다. “지난날 자네는 나에게 불행한 일이 있을 거라 말했는데 다행히 살아 돌아왔네. 장차 밝은 조정을 볼 수 있을 것이니 그 불행이 지금은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루는 그의 가까운 친척이 말을 빌려간 뒤 돌려주지 않자 하인들이 그 말을 찾아올 것을 청하였다. 윤홍이 허락하자 하인은 그 친척집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그 집에 가보니 말은 이미 팔아버린 뒤였다. 이 말을 들은 윤홍이 허허 웃으며 중얼거렸다. “내가 건망증이 심하여 말을 팔았다는 얘기를 들었으면서도 찾아오도록 하였구나.”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윤홍의 큰 도량에 탄복하였다.
윤 홍(尹 泓) 1655년(효종 6)~1731년(영조 7) 본관은 남원이며 자는 정원(靜源). 호는 정재(靜齋)이다. 1685년(숙종 11) 음보로 광릉참봉(光陵參奉)이 되었으며, 그 뒤 여러 관직을 거쳐 1721년(경종 1) 능주 목사를 지냈다. 1722년에 신임사화가 일어나고, 그 공신의 회맹(會盟) 때 참여하지 않은 사실이 문제되어 금산(金山)에 유배되었다. 영조가 즉위하기 직전 유배에서 풀려나 그 이듬해에 장악원정·군자감정을 거쳐 첨지중추부사를 지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