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념적 사고는 울안에 있는 돼지의 주둥이다. 글 속에서 다른 단어를 통째로 삼켜버린다. 마치 자석과 같은 힘이 있어서 주위의 언어들을 끌어당겨 제 몸에 녹여 버린다. 그래서 글 가운데에서의 관념적 사고는 군림하려는 군주와도 같다. 언제나 관념의 문제는 선악의 개념과 죽음에 대한 원론적이며 형식적 한계에 집착한다. 관념적 사고는 정상 궤도의 이탈을 허용하지 않는다. 굳게 용접된 사유의 틀이 너무나 탄탄하며 완벽한 것이다. 아무리 망치로 두들겨도 깨트려 지는 것을 좀처럼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관념은 고집불통인 할아버지의 곰방대다. 이데올로기를 두고 관념주의라 한다. 관념적 사고와 관념적 인간은 서로 이웃처럼 상통한다. 관념 속에는 다른 생각과 사상이 비좁아 들어갈 수 없으며, 대부분 빗장을 채우려는 속성이 있다. 그러므로 관념적인 사람은 도덕과 윤리적 사고의 수위(水位)가 가슴까지 올라와 있기 때문에 새 물을 부으면 금방 숨이 차게 마련이다. 관념적인 사람 또한 옷차림으로 말하면 캐쥬얼 보다는 정장차림이거나 대개는 화려하지도 않다. 왠지 무겁고 보수적이며 답답하다. 이처럼 관념적인 사람은 관념어 사용을 즐거워한다. 관념어를 많이 쓴다고 결코 지식인은 아니다. 지식인이란 서정적 정서와 아름다움을 두고 새로운 변화와 다분한 꿈을 지향해 가는 사람일 것이다. 따라서 예술적 감성에서의 관념은 어떤 사물을 해석하기 보다는 율동으로 읽어야 한다. 인간관계적 이해의 너그러움은 관념의 패러다임보다는 보편적 가치관의 잣대와 변화의 가능성을 염두해 둘 때 서로간의 화해의 폭이 넓어지며 따라서 감상의 깊이와 높이도 자율적이 된다. 관념어의 양식은 항아리에 채워진 물과 같아서 증발되는 것 말고는 항상 고여 있다. 항아리를 깨트릴 때 다른 사고의 새로운 항아리를 구워낼 수 있는 것이다. 관념어는 말 속에 의미가 굳어진 변화를 거부하는 단단한 표피로 쌓여져 있다. 한편 시적 형상화라고 하는 것은 관념적 언어의 나열이 아니라 예술성의 정적(靜的)과 동적(動的)의 이미지를 디자인하는 것이다. 어떤 관념에 빠지거나 매료되면 권위적 사고에 물들게 되는 위험성이 내재되어 있다. 그 상상은 자칫 생각의 틀 내지는 사유적(思惟的) 단정한 질서와 조소(彫塑)적 이며 주지적(主知的) 경향에 치우칠 수 있다. 만들어진 그릇과 다 핀 꽃은 이미 관념이 되었기에 그렇다. 여기서 변화를 용납하지 않는 어떠한 추상도 이미 관념인 것이다. 더구나 시 창작에 있어서 시적 이미지(상상력)의 형상화는 흙이 반죽되어 모양을 드러낸 후 가마(窯)에 넣고 장작불을 지피듯이 처음부터 완성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그려내야 함이다. 이와 같이 관념적인 시어의 잔칫상에는 항시 관념어가 진수성찬이다. 잘 차린 음식상은 본래 먹을 것이 없는 것과 같다. 시 속에서의 관념어는 딱딱한 껍질로 둘러싸인 빛 좋은 열매다. 그러므로 시 창작에 있어서 관념어를 쓸 때는 마리린 먼로의 파리똥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