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홍순이 호조판서로 있을 때 깨진 동전 한 푼을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사람을 시켜 동전을 녹여 합쳤는데 거기에 들어간 돈이 모두 두 푼이었다. 어떤 사람이 이상히 여겨 물었다.“두 푼을 들여 한 푼을 만들면 손해인데 왜 그렇게 하십니까?” 그러자 정홍순이 대답했다.“나는 한 푼을 손해 보았지만, 나라로 보면 한 푼의 이익이니 어찌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어느 해, 그의 딸이 시집을 가게 되었다. 정홍순은 딸의 혼례에 쓸 비용을 계산하다가 부인에게 물었다. “예복과 면포를 마련하려면 돈이 얼마나 들겠소?”“8백 냥은 있어야 합니다.” “잔치 비용은 얼마나 들겠소?”“4백 냥입니다.” “그럼 그때 맞추어서 주겠소.” 그러나 혼인날이 되어도 예복과 면포는 도착하지 않았다. 정홍순은 몹시 다급한 얼굴로 부인에게 말했다. “내가 오래 전에 상인에게 부탁했는데 그가 오지 않는구려. 하지만 한 나라의 정승이 되어 어찌 개인적인 일 때문에 그에게 벌을 주겠소. 차라리 전에 입던 옷을 빨아 입혀 시집보내시오.” 그러나 문제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잔치를 벌이려면 음식이 있어야 하는데 시간이 다 지나도록 음식이 도착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정홍순은 몹시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부인에게 말했다. “상인이 또 내가 요구하는 날짜를 맞추지 못했구려. 차라리 사람을 시켜 사오는 것만 못하오. 우선 간단히 술과 안주를 준비하시오.” 어쨌든 혼인잔치는 어물쩍 넘어가 버렸다. 그의 사위 역시 이름난 재상의 아들이었는데 일찍부터 장인이 지나치게 인색한 것에 불만이 있었다. 어느 날, 그 사위는 아침 일찍 장인어른 댁에 들렀다. 마침 새벽부터 비가 내렸는데 정홍순은 사위에게 삿갓과 나막신을 주며 말했다. “너는 네 집에 돌아가서 아침을 먹도록 하라. 나는 준비한 밥이 없고 너는 이미 지어놓은 밥이 있으니 굳이 여기서 오래 기다릴 것 없다.” 이 일로 사위는 장인에게 서운한 감정을 품었다. 그리하여 사위는 2년 동안이나 처가에 가지 않았다. 사위가 찾아오지 않자 정홍순은 직접 편지를 써서 사위와 딸을 불렀다. 마지못해 처가에 온 사위는 얼굴이 잔뜩 굳어 있었다. 딸 내외가 인사를 올리고 나자 정홍순은 두 사람을 데리고 뒤뜰로 향했다. 뒤뜰에는 조그만 집이 한 채 지어 있었는데 정원이 크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이윽고 정홍순은 만면에 미소를 띠고 딸을 바라보며 말했다. “옛날 네가 시집갈 때 혼수 비용을 알아보았더니 천2백냥이 든다고 하더구나. 어찌 남에게 보이기 위해 그런 큰돈을 써야 한단 말이냐. 나는 그 돈으로 매년 이자를 불려 이 집을 짓고, 또 시골에 땅을 사서 해마다 수백 가마의 곡식을 수확하고 있다. 앞으로 네가 이곳에서 살도록 해라.” 그제야 딸 내외는 아버지의 뜻이 어디 있었는지 깨달았다. 호조판서가 된 지 10년 동안 그는 꼼꼼히 나라의 재산을 챙겼다. 나라의 재물은 비록 송곳 하나라도 친히 살펴 나라의 창고가 가득 찰 정도였다. 그는 정승이 된 뒤 낡은 집을 수리하였다. 그때도 그는 일당을 가지고 일꾼들과 사사건건 다투었다. 그러자 자제들이 이를 민망히 여겨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님께서 정승 자리에 계신데 한낱 천한 일꾼들과 푼돈을 가지고 다투시니 체통을 지키십시오.” 그러자 정홍순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지 않다. 나라의 정승은 한 나라의 기준이다. 내가 만일 일당을 많이 주게 되면 일꾼들이 가난한 백성들에게도 그만한 일당을 받을 것이니 백성들이 곤란을 겪을 것이다.”
정홍순(鄭弘淳) 1720년(숙종 46)~1784년(정조 8) 본관은 동래이며 자는 의중(毅仲). 호는 호동(瓠東)이다. 1745년(영조 21)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여러 벼슬을 거쳐 호조판서에 올랐다. 호조판서로 10년간 재직하면서 재정문제에 특히 재능을 발휘하여 당대 제일의 재정관으로 명성을 날렸다. 1762년 호조판서와 예조판서를 겸하였는데 마침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장의(葬儀)를 주관하면서 미세한 것까지 한 쪽씩 떼 내어 이를 보관하였다. 정조가 즉위한 후 앞서 세자의 장례여부를 알고자 당시 예조판서였던 그를 부르자 그동안 간직해 두었던 것을 내어다 보였다. 정조는 부장품이 풍부하고, 예(禮)에 빠진 것이 없음을 보고는 그를 우의정에 임명하였다. 이후 좌의정에 이르렀는데 정승이 된 뒤에도 세세한 일까지 검소와 절약으로 일관하였다. 시호는 정민(貞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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