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한시협회 포천지회장 리효종 권필이 젊어서 처음 벼슬에 올랐을 때, 광해군의 처남 유희분의 권세가 대단하였다. 어느 날 권필이 친척집에 가서 술을 마시고 취해 누웠는데, 마침 유희분이 들어서면서 권필을 발로 툭 차며 말했다.“일어나! 유희분이 왔다.” 권필이 눈을 부릅뜨고 유희분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네가 유희분이냐? 네가 부귀를 누리고 있으니 나라꼴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이 아닌가? 나라가 망하면 네 집도 망할 것인데, 도끼 날이 유독 네 목을 자르지 않는 것이 이상하구나!” 그 말을 들은 유희분은 아무 말도 못한 채 참혹한 얼굴로 나가버렸다. 훗날 유희분은 그를 무고하여 귀양가도록 했다. 시문으로 이름을 날리던 권필이 일찍이 한가한 벽촌 마을을 지날 때였다. 길을 걷다가 갑자기 소나기를 만나자 그는 고을 좌수(座首)의 집으로 잠시 몸을 피하였다. 좌수의 집으로 들어가니 그 집 대청에 대여섯 명의 선비들이 모여 앉아 술을 마시며 시를 짓고 있었다. 권필은 초라한 차림이었으나 어쩔 수 없이 구석에 끼여 앉으며 선비들에게 인사를 청했다. 선비들이 권필에게 물었다.“어떤 사람이기에 남의 자리에 불쑥 뛰어드는가?” 권필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나는 원래 못난 사람이라서 벼슬은 할 수도 없고 장사나 좀 해보려고 마을로 가는 중이오. 길을 가다가 마침 흥에 겨워 있는 선비들의 모습을 보고 술이나 한잔 얻어먹고 싶어 들어왔소이다.” 술잔을 들고 글을 짓던 선비들이 권필을 돌아보며 다시 물었다. “우리가 시를 짓는 취미에 대해 자네도 좀 아는 바가 있는가?”“어찌 나 같은 비렁뱅이 장사치가 감히 시를 짓는 취미를 알겠소? 글을 짓는 취미란 대체 어떤 것입니까?” 선비들이 웃으며 말하였다.“그것은 사물을 보고 감동되어 흥취가 돋우어지면 찰나에 일어나는 마음의 변화를 글로 옮기는 것이라네. 그래서 시를 살아있는 그림이라고 하는 것이네.”그 중 한 선비가 자신이 지은 시를 자랑하며 말했다. “이태백이 살아 있어도 내가 지은 글귀만은 못할 것이로세.”곁에 있던 다른 선비도 나섰다. “내가 지은 구절은 두보도 못 쫓아올 것이네.”또 다른 선비가 말하였다. “자네들이 지금 글을 자랑하고 있지만, 자칫 내 시가 꺾여질까 두렵네.”좌우의 선비들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꺾여질까 두렵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선비는 제법 정중하게 말했다.“저 나무를 보게. 너무 높으면 바람에 꺾이지 않는가? 내 시도 품격이 너무 높으니 자칫 꺾일까 두렵다는 말일세.”듣고 있던 여러 선비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한 선비가 권필에게 술 한잔을 부어주면서 말했다.“자네는 글을 짓지 못한다니 속담 같은 글귀라도 하나 만들어서 술자리를 즐겁게 해보게.” 그러자 권필은 술 한잔을 맛있게 비우고 나서 읊기 시작했다. 문무(文武)를 아울러 배웠으나 모두 성공하지 못했으니 선비도 아니고 장수도 아닌 미치광이가 되어버렸네 훗날 그대들이 혹시 한양에 오는 날이 있으면 물어보게 주막집 아이들도 내 이름을 외우리. 선비들이 이상한 듯 얼굴을 마주보며 중얼거렸다. 한 선비가 물었다. “시는 훌륭하오만, 대체 그대는 누구기에 주막집 아이들이 이름을 외운단 말이오?” 그러자 권필은 그 선비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 이름은 권필이오.” 여러 선비들이 깜짝 놀라 엎드려 절하고, 그를 이끌어 상좌에 앉히며 술을 권했다. 그러나 당대의 시인 권필도 최고의 시인은 아니었다. 당시 최립은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명나라에 갔을 때 왕세정(王世貞)을 만나 문장을 논하였고, 그곳 학자들로부터 명문장가라는 격찬을 받았다. 그의 문장은 차천로(車天輅)의 시, 한호(韓濩)의 서(書)와 더불어‘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어느 날 권필이 최립에게 물었다. “지금 그대를 최고의 문장가로 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인은 누가 최고입니까?” 권필은 은근히 자신이 최고의 시인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권필의 물음에 최립이 답하였다. “내가 죽으면 공이 최고 시인의 자리를 계승할 수 있겠지요.” 권필은 아무 말도 못하고 물러나왔다고 한다. 당시 문명을 날리던 여덟 명을‘팔문장(八文章)’이라 불렀는데, 옥봉 백광훈(白光勳), 구봉 송익필(宋翼弼), 중호 윤탁연(尹卓然), 아계 이산해(李山海), 고담 이순인(李純仁), 고죽 최경창(崔慶昌), 간이 최립(崔?), 청천 하응림(河應臨) 등이 그들이다.
권 필 1569년(선조 2) ~ 1612년(광해군 4). 본관은 안동이며 자는 여장(汝章). 호는 석주(石洲)이다. 정철(鄭澈)의 문인으로, 술과 친구를 좋아하고 성격이 자유분방하여 벼슬을 하지 않은 채 야인으로 일생을 마쳤다. 동료들의 추천으로 제술관(製述官)이 되고, 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으며, 강화에서 많은 유생을 가르쳤다. 광해군 초에 권신 이이첨이 교제할 것을 청했으나 단호하게 거절했다. 유희분(柳希奮)의 전횡을 시로 풍자하였는데, 광해군이 대노하여 시의 출처를 찾던 중 이에 연좌되어 해남으로 귀양가다가 동대문밖에서 행인들이 동정하여 주는 술을 폭음하고 이튿날 44세로 숨을 거두었다. 저서로 『석주집』, 『주생전(周生傳)』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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