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수경은 선조 때의 이름난 재상이었다. 어렸을 때 그는 자태와 용모가 무척 아름다웠다. 그가 남촌에 살 때 이웃과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는데, 이웃집이 바로 재상댁이었다. 어느 날 밤, 그는 홀로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읽고 있었는데 홀연히 한 처녀가 나타나 문을 열고 들어와 책상 옆에 앉았다. 그가 읽던 책을 다 읽고 나서 처녀를 향해 말했다. "그대는 어느 집 따님이기에 늦은 밤에 나를 찾아왔소?" "저는 담 너머에 있는 집의 딸입니다. 도련님의 책 읽는 소리를 듣고 마음이 동하여 저도 모르게 이곳까지 따라왔습니다." 처녀의 얘기를 들은 심수경이 정색을 하고는 꾸짖었다. "낭자는 재상 댁 규수로서 남몰래 담 구멍으로 엿보다가 이렇게 부끄러움도 모르고 남정네를 찾아왔으니 마땅히 종아리를 맞아야겠소. 문 밖으로 나가 나뭇가지를 꺾어 오시오!" 처녀는 몹시 부끄러워하며 즉시 밖으로 나가 나뭇가지를 꺾어 가지고 왔다. 그는 처녀의 종아리를 때리며 훈계한 다음 돌아가게 했다. 처녀는 부끄러워하면서 돌아갔다. 뒷날 그가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에 올라 재상이 되었을 때였다. 그때 그는 동인 세력으로부터 공격을 당하게 되었는데, 특히 두 명의 형제가 동인의 주동자가 되어 준열하게 그를 탄핵하였다. 그들 형제는 사간원과 사헌부에 각각 몸담고 있었다. 어느 날 두 사람은 집에 돌아와 밤늦도록 심수경을 탄핵하는 상소문의 초안을 작성하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어머니가 말했다. "네가 탄핵하려는 사람이 누구냐?" "심수경입니다." 그의 이름을 들은 어머니가 아들을 말리며 말했다. "안된다. 그 사람은 군자이니라." "어머니께서 그걸 어찌 아십니까?" 어머니는 오랫동안 한숨을 내쉬다가 이윽고 처녀 적에 심수경으로부터 종아리를 맞았던 일을 말해 주었다. 그로 인해 그 형제는 감히 심수경을 탄핵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