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한시협회 포천지회장 리효종 오윤겸이 평강현감으로 있을 때였다. 그때 감사 정구(鄭逑)가 강원도 지역을 순찰하기 위해 강릉에 도착했다. 정구는 도착하자마자 강릉부사에게 말했다. “내가 평강에 가면 반드시 그 현감에게 곤장을 칠 것이다.” 강릉부사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무슨 까닭입니까?” “그가 스스로 선비라 일컬으며 문서를 제 시간에 끝내지 못하고 있소.” 그러자 강릉부사는 빙긋이 미소를 머금고 정구에게 말했다. “평강에 이르러 다짜고짜 매질을 하면 그가 매를 맞을지 모르지만, 만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매질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찌 그럴 수가 있겠는가? 두고 보라.” 정구는 곧 강릉을 출발하여 평강으로 향했다. 평강에 이르자 정구는 곧 형틀을 준비하고 현감으로 있는 오윤겸을 불렀다. 하지만 잠시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강릉부사의 말대로 오윤겸의 행동이 단아하고 말을 하는 것이 물 흐르듯 하였다. 정구는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맞대고, 오윤겸과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구는 평강에서 돌아오는 길에 강릉에 들러 부사에게 말했다. “그대 말이 맞았소.” 오윤겸이 이조판서로 있을 때 같은 집안 출신인 한 사람을 벼슬에 천거한 일이 있었다. 그가 강력히 천거하자 임금이 물었다. “그는 어떤 사람인가?” “신의 집안 사람으로 맡은 소임을 감당할 만한 사람이기에 첫 번째 후보로 천거하였습니다.” 임금은 이조판서를 믿고 그 사람을 즉시 낙점하였다. 이윽고 그날 저녁이 되어 임금은 정사를 마치고 신하들을 위해 술자리를 베풀었다. 그때 오윤겸이 술을 많이 마시고 취했는데, 갑자기 임금 앞에 엎드려 눈물을 흘렸다. 임금이 그 까닭을 몰라 물었다. “왜 우는가?” “나라가 망하려고 해서 웁니다.” “나라가 망하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신이 집안 사람을 벼슬에 천거하였는데, 이는 그 사람이 아무리 출중하다 해도 사사로운 정이 개입된 것입니다. 마침 전하께서 물으시므로 신은 같은 집안 출신임을 사실대로 답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그 사람을 낙점하셨습니다. 그것은 신의 입장을 고려하여 바른 도리로 신을 꾸짖지 못한 것입니다. 아래 있는 사람이 먼저 정도를 잃었고, 임금 또한 정도를 잃었으니 나라가 망하지 않고 어떻게 견디겠습니까?” 임금이 이 말을 듣고 그를 더욱 존중하였다. 정승 이원익과 오윤겸은 모두 학덕이 높기로 이름나 있었다. 그러나 직위로 볼 때 이원익의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원익은 죽기 전에 숙평(叔平) 이준(李埈)에게 미리 자신의 묘비명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이준은 유성룡의 문인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싸운 공으로 형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양한 인물이었다. 이후 그는 여러 벼슬을 거치면서 당파를 비판하며 정도를 걸어간 올곧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이원익이 이준에게 묘비명을 부탁한 것은 자신이 행적을 너무 미화하거나 과장되게 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오윤겸은 임종 때 이렇게 유언하였다. “묘비도 세우지 말고 시호(諡號)도 청하지 말 것이며, 남에게 만장(挽章)도 청구하지 말라.” 그래서 사람들은 비록 이원익이 학식은 높았으나 죽을 때는 오윤겸에게 한 판 진 것이라고 말했다. 오윤겸(吳允謙) 1559년(명종 14) ~ 1636년(인조 14).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자는 여익(汝益). 호는 추탄(楸灘) 또는 토당(土塘)이다. 1582년(선조 15) 사마시에 합격한 뒤 1589년 전강에서 장원하여 참봉 등을 지냈다. 이후 평강현감으로 5년간 봉직하면서 1597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현감을 그만둔 뒤 한때 시골로 내려갔다가 내직을 두루 거쳤다. 그러나 1602년 곤경에 처해 있던 스승 성혼을 변호하다가 배척받아 주로 외직을 전전하였다. 1610년(광해군 2) 비로소 내직으로 들어왔으나 정인홍(鄭仁弘)을 탄핵하다가 강원도 관찰사로 좌천되었다. 잠시 중앙으로 복귀했으나 집권세력인 북인의 발호로 정계가 혼란해지자 광주목사(廣州牧使)를 지원하였다. 폐모론이 제기되어 이를 반대하다가 탄핵을 받자 벼슬을 그만두고 광주 토당(土塘)으로 물러나 화를 피하였다. 1622년 우참찬에 오르고 인조가 즉위한 후 대사헌과 이조·형조·예조의 판서를 두루 지냈다. 이어 예조판서를 거쳐 1626년에 우의정을 지내고 좌의정을 거쳐 1628년 70세로 영의정에 이르렀다. 저서로 『추탄문집』등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