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성(靑城)」은 홍대용, 박지원,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등과 교유하여 이들에게 가학(家學)과 스승 「준(焌)」에게 전수(傳受) 받은 상수학적 학풍(象數學的 學風)을 전달하여 북학사상의 형성에 일익을 담당하였던 인물이다. 그러나 「청성(靑城)」은 북학파에 가담하지 않고 낙론계의 성리학과 북학사상과의 중간적 위치를 유치하여 정조때 추진된 「문체반정정책(文體反正政策)」에 적극 호응하여 북학파의 성향과 다른 면모를 보인 특색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우선, 우리는 청성 성대종의 호인 「청성(靑城)」이란 이름은 내 고향 포천의 옛 땅(고을)이름이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만큼 내 고향 포천을 사랑한 애향심이 돈독한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존경어린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영조조 8년(1732년) 소흘읍 초가리 적암촌에서 출생하였으며 성장하였다. 자는 「사집(士執)」호는 「청성(靑城)」본관은 창녕, 내섬시직장「효기(孝基)」의 자, 「김준(金焌)」의 문인이다. 어려서 총명하고 언론이 창달하여 신선과 같다는 평을 들었다. (똑똑하고 말을 잘했다.) 서얼출신으로 영조29년(1753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영조 32년(1756년) 정시문과 을과 급제하였으나 신분적 한계로 벼슬에 오르지 못할 처지였으나 영조의 탕평책에 편승한 「서얼통청운동(庶孼通淸運動)」의 영향으로 영조 41년(1765년) 청직(淸職)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울진현령을 지냈으며 영조48년(1772년) 사헌부 지평, 장령, 운산군수를 지냈다. 정조 1년(1727년) 용양위부사과를 거쳐 교서관교리(校書館校理)로 「국조보감(國朝寶鑑)」을 편수하였다. 정조7년 통신사를 수행, 일본의 문사들과 교류하였고 이듬해, 흥해군수, 정조16년(1792년) 북청도호부사, 위원군수 등을 지내며 선정(善政)을 폈다. 1795년 외각(外閣)으로 들어와 「장릉사보(莊陵史補)」의 편착 작업에 참여하였고 「존주휘편(尊周彙編)」의 편집에 참여 착수하였으나 병으로 완성하지 못하고 아들 성해응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저서로는 조인영이 서문을 쓴 「청성집(靑城集)」10권 5책과 「청성잡기(靑城雜記)」가 있다. 이렇듯 「청성 성대중」은 「북한사상」의 형성에 일익을 담당했던 「상수학적(象數學的)」학풍의 학자였으며 성리학과 북한사상과의 중간적 위치를 견지한 대학자였다. 또 문화의 꽃을 피우려했던 개혁군주 정조의「문체반정정책(文體反正政策)」에 적극 호응한 인물이었다. 정조 20년(1796년) 임금 정조로부터 학식과 필법이 순정(醇正)하다고 칭찬을 받고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여 「순재(醇齋)」라고 「자호(自號 :스스로 호를 삼음)」하였으며 아들 성해응에게는 정조가 내각에서 간행하는 책은 모두 하사받은 광영을 입었다. 님은 「향적산(香積山)」에 잠들고 계시다.(순조3년 78세:1809년) 필자연락처 (02)932-24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