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한시협회 포천지회장 리 효 종 광해군 때 이이첨은 임해군(臨海君)과 영창대군을 제거하는 데 앞장섰다. 하지만 정온은 사간원에 있으면서 이를 극구 반대하였다. 어느 날 정온이 이이첨에게 말했다. “철모르는 어린아이가 어찌 반역을 꾀한단 말인가? 듣건대 대비께서는 밤낮으로 울먹이며 어린 아들과 함께 죽지 못할까 걱정한다고 하는데, 만일 불행한 일이 벌어지면 그래도 그대들은 훗날에 할 말이 있겠는가?” 그러자 이이첨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대꾸했다. “대비를 함께 폐위시키면 되지 않겠나?” 이이첨이 화를 내며 일어서려 하자 정온이 웃으며 말했다. “일어설 것 없소. 내가 곧 갈 것이오.” 이후 정온은 이이첨과 절교하였다. 그는 임금께 여러 번 간하려 하였으나 간신들이 정권을 잡고 있는 바람에 좀체 기회를 얻을 수 없었다. 그의 어머니가 이를 알아차리고 아들에게 말했다. “힘쓸지어다. 이 늙은 어미 때문에 마음이 변하지는 말거라.” 이윽고 광해군은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고 부사 정항(鄭沆)을 시켜 몰래 살해하였다. 이에 정온은 광해군에게 상소를 올려 결연히 주장하였다. “어린아이는 실상 반역을 모의한 사실이 없는데, 전하께서는 한낱 힘쓰는 무부(武夫)의 손을 빌려 대군을 죽였습니다. 만일 영창대군을 살해한 강화부사 정항을 죽이지 않으면 전하께서는 선왕들의 묘 앞에 설 면목이 없을 것입니다.”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하려 할 때도 그는 극구 반대하였다. 광해군은 노하여 그를 제주도로 귀양을 보냈다. 그는 10년 동안 가시 울타리 안에 살면서 스스로 ‘고고자(鼓鼓子)’라 칭하고는 글을 지으며 세월을 보냈다. 그는 섬에 유배되어 있으면서 첩을 하나 얻었는데, 귀양을 마치고 돌아갈 때 동행하였다. 그는 첩을 사랑하여 남원부사가 되었을 때도 여염집에 감추어두고 부인에게는 매번 친구를 만나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몰래 만났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물었다. “공께서는 이이첨같이 흉악한 무리가 위세를 떨칠 때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어찌 집에 있는 부인을 두려워하십니까?” 그러자 정온은 허허 웃으며 답하였다. “이이첨같은 무리야 죽이면 그만이지만, 마누라는 그럴 수도 없고 하루종일 나를 못살게 구니 참으로 두렵다네.” 이후 인조가 즉위하고 병자호란이 발발하였다. 그때 정온은 임금을 모시고 여러 대신들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피했다. 워낙 상황이 급박하였으므로 대부분의 조정 관원들이 걸어서 임금의 뒤를 따랐고, 더러는 남한산성으로 가는 도중에 도망치고 말았다. 이때 장수 신경진(申景?)이 병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지나다가 정온을 바라보고 외쳤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누구의 허물이오? 공은 대신인데 어찌 한마디 말로써 백성들을 안정시키지 못하오?” 정온은 신경진에게 사과한 후 웃으면서 말했다. “공은 용맹한 군사를 수천 명이나 거느렸는데, 적은 쳐부수지 않고 그 군사들을 무엇에 쓰려고 하시오?” 이윽고 강화도가 함락되고 왕실의 가족들이 잡혀가자 최명길은 청나라 장수를 찾아가 항복하려 하였다. 그러나 정온은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나라가 망한다 해도 임금으로서 오랑캐에 항복하는 것은 수치다.” 그러면서 정온은 스스로 칼을 뽑아 자신의 배를 찔렀다. 칼날이 뱃속까지 들어갔으나 다행히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피를 흘리며 쓰러지면서도 그는 고개를 쳐들고 부르짖었다. “최명길이 전하로 하여금 항복하게 하였으니, 오랑캐는 분명 조선의 옥새까지 요구할 것이다!” 이후 그는 덕유산 골짜기로 들어가 초가집을 짓고 조를 심어 생계를 이어갔다. 그는 숲 속에 은거하면서 해가 바뀌어도 청나라의 달력을 쓰지 않았고, 세속과 발길을 끊은 채 숨을 거두었다. 정 온 (鄭 蘊) 1569년(선조 2) ~ 1641(인조 19). 본관은 초계(草溪)이며 자는 휘원(輝遠), 호는 동계(桐溪) 또는 고고자(鼓鼓子)이다. 1601년(선조 39) 진사가 되고, 1610년(광해군 2)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다. 임해군 옥사와 영창대군 피살, 그리고 인목대비에 대한 폐모론의 부당함을 주장하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제주에서 10년 동안 학문에 전념하다가 인조반정이 성공한 후 대사간, 대제학, 이조참판 등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이조참판으로 최명길(崔鳴吉) 등의 화의주장을 극구 반대하였다. 그후 관직을 버리고 덕유산으로 들어가 조(粟)를 심어 생계를 잇다가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