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평묵 선생은 가산면 가산리 출생의 대학자로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 선생의 수제자로 1842년 24세시 최익현, 유중교, 유인석, 유기일 등과 함께 위정척사 사상(衛正斥邪)의 실천가였으며 의병활동의 전개로 민족정기를 바로 세운 최선봉의 큰 인물이었다(화서 선생의 수제자) 서양의 거센 바람 휘몰아 오니 흰머리 귀양길에 다시 나섰소 동파로 아홉 번을 겪었지만 한번도 후회라곤 하질 않았네 벗님(友人)네여 어서 눈물을 거둬주구려 이 시는 임오군란의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유배(流配)길에 오르자 친지, 제자들이 나와 슬픈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고 남긴 시이다. 선비정신이 투철하고 의연한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훌륭한 어머님 황씨의 지극정성이 천재이자 문·충·의(文·忠·義)만을 위해 살다간 위해 살다간 중암을 만들었다고 한다. 운담정사(雲潭精舍) 는 님이 말년에 사시던 일동면 댁이며 거연대(居然臺)는 양주, 포천, 연천, 양평의 선비들이 매년 모여 중암선생과 함께 시회(詩會)를 열던 곳인데 130여명의 님을 따르는 선비들이 모였다 한다. 님의 뿌리는 중종조 조광조와 함께 왕도정치를 제창하던 김식(金湜)과 효종조에 영의정을 역임한 경제학자이며 실학의 선구적 역할을 한 김육(金堉)의 후손인데 조부 김시곡(時谷)의 유훈(遺訓)인 군군, 신신, 부부(君君, 臣臣, 父父)의 도리를 다하라는 바를 종신토록 유념한 한말의 대학자였다. 1891년(고종 20년)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바람이 몹시 불고 종일토록 눈이 내려 석자(1m)나 쌓여 하늘도 민족정기를 일깨운 충신의 타계를 슬퍼한다고 이웃들은 말했다고 한다. 3개월후, 전국사림장(全國士林葬)으로 백운산 기슭 다목동에 모셔졌다. 운담영당은 님의 모습의 모신 곳이며 제당을 설치하였으며 6.25당시 소실된 것을 1999년10월 복원하였으며 매년 3월10일(음력)이 제향일이다. 운담영당외에도 가평의 경현단과 우리 포천에는 산암단에서 제향을 지낸다. 님의 유훈으로는 후손들에게 벼슬하지 말고 백성을 위해 땀 흘려 일 할 것을 권했다고 전한다. 종손으로는 김유관(金裕寬)씨가 서울 충무로에서 인쇄업으로 평생을 보냈으며 그의 아들 김종수 박사가 열역학을 전공한 도미 유학도인데 한국과학기술원 교수로 재직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