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벌은 중종의 생모인 정현왕후의 이종사촌으로, 중종때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다. 그는 여러 고을의 부사를 지냈는데, 한 고을의 수령이 되면 도성의 다른 관청이나 기관에서 이것저것 요구하는 것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권벌은 단호히 거절하였다. 하루는 어떤 관리가 찾아와 일을 청탁하였는데, 권벌은 이번에도 끝까지 거절하였다. 그러자 관리가 화를 내며 말했다. “영감은 대체 뭘 믿고 이렇게 뻣뻣한 거요?” 관리의 말속에는 왕후의 배경을 믿고 뻣뻣한 것 아니냐는 조롱이 숨어 있었다. 그 말을 들은 권벌이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믿는 것은 오직 초가 두어 칸뿐입니다.” 그의 아들 동보(東輔)가 능참봉(陵參奉)에 있을 때였다. 동보는 낮은 직위에도 불구하고 늘 번들번들 살이 찐 말을 타고 다녔다. 이를 본 권벌이 크게 노하여 아들을 꾸짖었다. “네가 겨우 말직에 있으면서 번들번들 살이 찐 말을 타고 다니는구나. 짐승을 살찌우기 위해 말 먹이는 사람을 얼마나 여위게 했겠느냐. 그러면서 어찌 감히 사람을 구제하기를 바랄 수 있겠느냐?” 권벌은 특히『자경편(自警編)』과『근사록(近思錄)』을 좋아하여 늘 소매 속에 넣고 다니며 읽었다. 어느 날 중종이 신하들을 불러 후원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모두 실컷 놀다가 술에 취하여 내시들의 부축을 받으며 돌아갔다. 신하들이 모두 돌아간 뒤 내시 한 사람이 뒤뜰에서『근사록』한 권을 주웠다. 내시가 누구의 물건인지 몰라 망설이자 중종이 말했다. “권벌이 떨어뜨린 것이니 돌려주거라.” 한번은 권벌이 식사를 하는데 계집종이 밥상을 들고 오다가 넘어져 그의 옷에 국을 쏟았다. 옷이 다 젖었는데도 그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오랫동안 벼슬에서 물러났다가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귀양을 떠났다. 그때 압송을 담당한 관리가 대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손님을 배웅하듯 태연히 유배지로 길을 떠났다. 그때 진사 금원정(琴元貞)이 그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소리내어 울자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그대를 대장부로 알았는데 어찌 눈물을 흘리는가? 죽음과 삶, 그리고 사람의 화와 복은 하늘에 달린 것이니 어떻게 할 것인가?” 그때 이언적(李彦迪)과 함께 귀양을 떠났는데, 권벌이 그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 찬성과 권 찬성이 한꺼번에 같이 왔으니 이 행차가 얼마나 빛나는가?” 비록 유배를 떠나는 길이었으나 권벌은 조금도 걱정하는 빛없이 오히려 농담을 주고받았다. 나중에 삭주로 유배지를 옮겨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권 벌 1478년(성종 9) ~ 1548년(명종 3). 본관은 안동이며 자는 중허(仲虛). 호는 충재(只齋)·훤정(萱亭)·송정(松亭)이다. 1496년(연산군 2) 진사에 합격하고, 1507년(중종 2)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뒤 예문관. 홍문관. 사간원 사헌부 등에서 요직을 역임하고, 1519년 예조참판에 임용되었다. 이때 조광조를 비롯한 사람들이 왕도정치를 주장하자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를 조정하려 하였다. 잠시 삼척부사로 나갔으나 기묘사화때 파직되었다. 그후 15년간 고향에서 지내다가 1533년 복직되어 병조판서·예조판서·좌참찬·우찬성을 지냈다.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이에 반대하여 대윤 세력을 옹호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소윤의 미움을 받아 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귀양을 떠났다가 삭주에서 죽었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 壁書事件) 을사사화 직후인 1547년(명종 2) 9월. 양재역에 문정왕후와 그를 지원하는 윤원형. 이기. 정순붕 등 집권층의 권력 독점과 비리를 폭로하는 내용의 대자보가 붙었다. 윤원형 등 소윤 일파는 범인이 누군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이 사건을 그들에게 비판적인 선비를 일망타진하는 계기로 삼았다. 이 사건으로 송인수가 사형되고 이언적. 노수신. 유희춘. 권벌 등 수십 명이 귀양을 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