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완(朴東完: 고종 22년 1885년~1941년) 님은 포천에서 박형순(朴馨淳)님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다섯 살 때부터 독선생(獨先生:가정교사)을 두고 한문을 배웠으며 13세때 포천의 명문가 현석윤님의 따님 현마리아와 결혼했다. 부친도 민족의식이 강한 분이었는지라 박동완님도 호를 근곡(槿谷:무궁화 골)이라고 지을만치 민족을 사랑하는 민족주의자였다. 1901년 서울로 이주 수하동에 정착, 양사동소학교, 한성중학교, 한성외국어학교 배재학당 대학부를 졸업했다. 감리교 제일교회 전도사, 기독교신보사 서기로 근무하여 당시 교회를 통한 독립사상과 민족주의 사상 운동에 힘썼다.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사상에 공감하고 당시 YMCA간사로 있던 박희도(후에 민족대표 33인의 한분이 됨)님으로부터 독립운동에 참여계획을 듣고 이에 적극 찬동했으며 함태영, 이갑성, 오화영 등과 함께 기독교계를 대표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3.1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2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YMCA 소년부장, 신간회 간사를 맡아 민족주의 사회운동에 적극 활동하고 헌신노력했다. 1931년 만보산 사건(중국 길림성 만보산 지역 수리관계사업을 둘러싸고 일본이 한국인과 중국인과의 관계를 이간질하여 분쟁을 일으켜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얻고 일본인의 간교한 술책으로 일본의 입지(立地)를 강화키 위한 사건: 일본의 민족성을 드러낸 사건으로 중국과 한국의 인명피해와 재산상의 손해가 막대했던 사건)이 일어나자 재만동포 옹호연맹을 결성 재무부장이 되어 현지의 사정을 조사하고 한·중 양국 국민이 서로 평화롭게 지내는 운동에 힘썼다. 1933년 일본 제국주의가 한반도에서 기승을 부리자 미국 땅 하와이로 망명하여 한인교회 목사로 시무하면서 국내 흥업구락부와 비밀 연락을 취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박동안 님은 근곡이란 호를 지닌자답게 살았다. 나라가 일본에게 강제로 점거 당하자 평생 우리 옷인 한복을 입되 바지 대님을 치지 않았다.(나라 잃은 못난 죄인을 자처한 행동) 또, 시계의 분침을 30분 늦게 맞추어 살았다.(표준시가 우리 서울은 30분 늦는게 정상임) 1962년 조국은 박동완님에게 건국훈장 복장을 수여하여 님의 은공을 기리었다.